침묵은 혼자만의 시간에 치료제와 같다. 늘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인지, 도통 복부에서 울림통을 사용하지 못해서 인지 나의 목소리는 자칫하면 쇳소리의 날카로움과 닮아간다. 금요일에는 그나마 일주일치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쉰 목소리가 납득이 되나, 일주일의 시작인 월요일에 목의 껄끄러움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혼자만의 시간에 지켜내는 침묵은 나에게 있어 이비인후과에 들락거리지 않아도 될 치료제가 분명하다.
타고난 목소리의 약함에도 견디지 못할 순간은 어른들과의 대화에서 어색함이 내려앉을 때이다. 함께 협의와 결정을 반복하는 시간, 어색함과 지루함이 찾아들면 어쨌든 해결을 봐야 하는 성격에 전투적인 목소리로 결정을 끌어간다. 결정을 끌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전투적인 설명에 목소리는 있는 대로 쇳소리로 변하고, 이후에 찾아올 책임감의 무게는 시간마저 바쁨을 예견하는 것이다.
나는 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어색한 침묵을 깨고, 앞서 나가는 나를 바라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데 말이다. 쉰소리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것도 모른 체하고 말이다.
전투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을 틈을 견뎌야 한다. 그래야 딸그락 거리는 무릎과 뚝뚝 거리는 손가락 마디가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그냥 있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침묵의 시간마다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