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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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펐다. 나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철학자다.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는 새하얀 돛이 여럿 달린 돛배가 한 척 놓여 있었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 배를 허공에 띄워 몸을 싣고는 대양으로 나아갔다. 내 생각엔, 바로 그때,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탄 그때, 나는 난생처음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원하기만 하면 나는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타고 혼자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그냥 얌전히 그 자리에 있는 척했다.
나의 질문과 대답
나로부터 도망쳐서 가본 곳이 있나요?
나는 말을 아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거절할 용기가 생각보다 나질 않았다. 나는 주저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요청에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은 상황, 그래서 나로부터도 도망치는 "침묵"을 선택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말문이 막히고, 생각이 꼬여버렸다. 어느새 말을 아끼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 나는 나로부터 도망쳐버린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답답했다. 시간은 붙잡을 수 없이 지나쳤고,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었다. 그곳에 다녀오면 뭔가 괜찮아질 것 같았다. 책임과 역할로 어깨는 점차 무거워졌고, 말문이 막혀버린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침묵의 요새"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도망쳐 가본 곳이 어느 누구도 찾아들지 않고, 오로지 홀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던 "침묵의 요새"였다면, 나를 일으켜 세워 도착해보고 싶은 곳은 "깊은 상호작용의 성"이었다.
나는 매일 쓰고 있다. 쓰고 있는 시간이 나에게 위안과 격려를 더한다. 침묵의 시간 동안 나는 사유했지만, 홀로 있던 그 시간은 늘 그 자리만 맴도는 외로움과 자기 비난의 아픔을 경험하도록 했다. 이제는 나는 나를 만난다. 지금도 원하기만 하면 나는 생각대화 활동을 구성하며 아이들과 깊은 상호작용의 성에 드나들 수 있다. 물론 그 자체를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길 원하거나 나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다. 활동을 온라인 공간에 매일 공유하면서 나의 일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침묵은 더 이상 나의 모든 것이 아니라, 선택의 지점이 되었다.
매일 쓰는 나는 깊은 상호작용을 원하는 욕구가 거세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