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일, 강등과 함께 시작된 기나긴 겨울
11월의 연이은 승리로 잠시 타올랐던 불꽃은 마지막 경기에서 허무하게 꺼져버렸다. 무조건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해야지만 강등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전의 모습이 무색하도록 가장 중요했던 그 날에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버렸다. 반데라 (*응원석에 걸어놓는 긴 천. 트리콜로는 상징색인 청백적을 번갈아 걸고, 응원 중에는 천을 펼쳐 잡고 뛴다)를 펼치고 청백적의 꽃가루를 휘날리며 응원했던 트리콜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후반전 추가시간부터 시작된 침묵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우리 대신 잔류에 성공한 강원 팀의 서포터들의 환호 속에도 이어졌다.
모든 것을 걸고 뛰었던 선수들이 고개를 떨구고 오열했다.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했던 준프로 선수들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서포터석 뿐만 아니라 일반석과 프리미엄석에 남은 팬들마저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오동석 나가!" (*오동석: 당시 수원삼성블루윙즈의 단장이었으며 '개 같은 프런트'의 줄임말인 '개런트'의 상징으로 여겨진 인물) 그 한마디에 모두의 분노가 폭발했고, 잠시나마 침묵하던 트리콜로의 외침은 빅버드를 뒤흔들었다. 수원의 개런트는 변명 같은 사과를 흘리고는 선수들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그마저도 모자라서 선수들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나가게 하고는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마이크를 잡을 차례가 염기훈 감독대행이 되었을 때, 결국 트리콜로는 무너지고 말았다. 울먹이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 염기훈 감독대행의 목소리 위로 트리콜로는 염기훈 응원가를 더 크게 불렀다. 전광판에 냉큼 올라온 변명의 여지가 없다, 죄송하다, 재창단의 각오로 다시 열심히 하겠다는 말들은 정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질없는 소리였다.
분노한 팬들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주동자가 누구신지'를 묻는 개런트가 남아있는 빅버드에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방 속까지 들어갔던 그 날의 청백적의 꽃가루와, 회사에서 잃어버렸다가 찾은 에어팟 케이스 위의 수원 엠블럼에 그날의 슬픔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강등은 연인과의 이별처럼, 아주 작은 흔적에도 나를 아프게 했다. 그 날이과 그렇게 되어버렸던 우리 모두가 생각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텅 빈 가슴을 부여잡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이 사실을 받아들인 채 시간이 지나가 내가 무뎌지기만을 바라야만 했다. '수원삼성의 강등'이 뉴스거리로 지나갈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선수들이 떠날 때 마다 눈시울이 시큰했다. 쓸개를 씹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구천과 같은 마음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원망을 곱씹었다. 흐르는 눈물을 꾹 참아 가슴에 묻어 몰락한 명가의 터에서 부활의 싹을 틔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시작은 제대로 된 새로운 감독의 정식 선임이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경험과 능력이 풍부해서 강등된 2부 리그에서 단번에 1부 리그로의 승격을 달성할 수 있을 만큼의 제대로 된 감독 선임을 시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팀을 애타게 기다리던 내게, 트리콜로에게 들려온 소식은 염기훈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었다. 강등의 주역이자 일체의 경험도 없고, 심지어 자격증마저 아직 다 따지 못한 상태의 사람을 감독으로 앉히다니. 12월 19일에 처음 들려왔던 소식은 모두를 뒤집어놨고, 결국 구단에서는 아직 결정된 일이 아니라며 발뺌했다. 염기훈 감독대행이 일체의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 사이에 초조해진 팬들은 다시금 홈구장이자 프런트의 사무실이 있는 빅버드로 다량의 근조화환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근조화환을 보냈고, 기사님이 무심코 놓고 가버린 화환을 재배치하기 위해 2023년의 크리스마스를 빅버드에서 보냈다.
1월 9일, 염기훈 감독의 정식 임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배포되었던 사진의 저장 날짜를 통해 염기훈 감독과 개런트가 이미 12월 19일에 결정을 내리고도 팬들의 반응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승격을 자신하던 다른 감독들의 의지는 끝내 무시되었고, 팬들의 결사반대마저 메아리 없이 사라졌다.
이별에 대한 가사로서 가장 절절하다고 느끼는 가사는 가수 이소라가 부른 '바람이 분다'라는 곡의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다'는 가사다. 그 가사와도 똑같이 그렇게 우리는 비참하게 강등을 당했지만 시간은 흘러 추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3월의 개막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트리콜로는 제목이 없는 응원가를 하나 발표했다. 다음 시즌에 N석에서 뛸 체력을 다져놓겠다며 유산소 운동을 하면서,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뛰어야 하니까.
"대답 없는 겨울의 메아리, 멍든 가슴 골짜기를 맴돌아
축복으로 기억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가슴에
블루윙 수원, 길 잃은 그날의 침묵을 기억해
블루윙 수원, 낮거나 높거나, 함께 가자 우리의 한 길"
K리그에 입문한 지 반 년차, 그리고 수원의 서포터로서 응원한 지 삼 개월 만에 첫 시즌에 바로 강등을 겪었던 시기의 기억은 아직 승격을 달성하지 못한 지금까지는 속이 쓰린 것들이다. 강등의 그날 전후로 썼던 팬 커뮤니티에 썼던 글들의 일부를 옮겨보았다.
2023년 11월 30일, <동료 트리콜로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로 승리를 가져옵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응원을 멈추고 침묵하고 싶을 때에, 넘어져도 일어나는 선수들을 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멀어지는 상대방을 그저 바라보고 싶을 때에, 쉬지 않는 트리콜로를 보던 선수들이 다시 달려 나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반다는 달리는 심장에 함께할 리듬을 위해 손을 굳게 만드는 추위도 이겨낼 겁니다.
아길레온은 제도의 푸른 하늘에 높일 청백적의 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원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던 삼거리광장 사장님도 그날은 문을 닫고 빅버드로 달려오실 예정입니다.
모두가 걱정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을 안고 각자의 방식으로 준비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낭만을 그려내는 동안,
궁금하고 초조하더라도 다른 경기가 아닌 우리의 경기에, 우리의 전장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의 별이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에 있을 네 개의 별과 같이
우리 스스로가 빛나서 우리가 바라마지않던 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모두의 마음을 모아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다 함께 싸워나가요.
우리의 목소리로 승리를 가져옵시다!
2023년 12월 3일, <가장 위대한 열두 번째 선수들, 그리고 기업에 대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
어제 카드섹션 때, 제 옆 세 자리가 코어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는 비어있었는데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 왼쪽에서는 제 색지의 한쪽을 잡아주고,
저는 그 옆자리의 색지를 제 뒷분과 함께 한쪽씩 들었고,
대각선 뒷자리는 그 앞의 색지도 함께 들었습니다.
정말 앞이 안 보이고 입에도 들어갈 정도의 꽃가루들은
빅버드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옷에서, 가방에서 하나씩 계속 나타나서
괜스레 코끝이 찡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뿐만 아니라 올 한 해 (그리고 다른 분들께는 더욱 오랜 시간) 동안,
팬들은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열심히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필드에서 유니폼을 입은 선수의 최소 절반 이상보다는 이 팬들이 보여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N석에서도 응원소리가 잦아드는 것이 싫어서, 나는 아직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정말 악을 쓰면서 부르던 그 응원가를 함께 불러주신 주변 동료분들,
그리고 그 침묵과 분노의 시간 끝까지 함께 해주셨던 모든 트리콜로에게
낭만과 헌신이라는 깃발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맞습니다.
2023년 12월 3일, <프렌테의, 수원의 데드라인: 우리 이제 그만 울어요 >
우리의 또 다른 개런트와의 싸움만은 승리로 끝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는
우리가 지켜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 울고 다시 힘을 모아보아요.
우리는 정말 올 한 해 최선을 다해왔고
우리가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많을 테니까요.
2023년 12월 25일, <침묵하는 26번에게: 팬들입니까, 프런트입니까 >
제도의 푸른 하늘에 높였던 청백적의 깃발과 우산을 꺾고
우리의 블루윙을, 수원의 꽃을 위해 숨이 막히도록 뿌렸던 꽃가루를 밟고
친구들과 함께 노래한, 이 사랑에 후회는 없다는 그 응원에 귀를 막고
팀보다 위대한 팬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겨준 카드섹션을 외면하고
당신의 모습에 환호하던 그 팬들의 눈물과 분노 앞에서
프런트와 함께 대관식을 올려야만 합니까.
수많은 강등콜과 온갖 조롱을 대신 견딜지언정 당신에게는 환호하였던
당신의 말 한마디에 잠시나마 검은 옷이 아닌 푸른 옷을 입었던
이 순간뿐만 아니라 당신의 14년을 함께 하였던 팬들이 아닌
잠시면 돼, 여론은 바뀔 거야, 넌 레전드잖아, 해줘,라고 속삭이는 프런트를 택할 겁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묻습니다.
팬들입니까.
프런트입니까.
2024년 1월 12일, <'염기훈 씨'를 응원하지 않는 한 트리콜로의 선언문 >
염기훈 씨에게 질문합니다.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하는데, 지금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걸려고 하나요?
저는 작년 5월에 처음으로 빅버드를 찾았기에 염기훈 선수의 플레이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2023년 12월 2일에, 모두와 같이 큰 소리로 염기훈 응원가를 부르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동료 트리콜로들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두가 유니폼을 가지고 있던,
그를 향한 조롱을 대신 받아내며 끝까지 버티는 그 트리콜로의 레전드였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팬들과 다른 선택"을 한 본인의 선택이 "제일 우선"이었고,
"외부에서 누가 뭐라고 이게 아니라 항상 제 선택이 맞다고 생각을 했다"며
눈물로 호소하던 팬들을 외면하고 본인을 위한 선택을 한 것도 모자라서
왜 그 선택을 지지해주지 않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토록 사랑해 주었던 레전드에게 외면당했을 뿐만 아니라
드레스코드부터 이번 선택까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요구받기만 하는 팬들이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안타까울 뿐이고
그들을 생각하면 염기훈 씨를 '우리' 감독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2024년 2월 12일, <D-10: 모두의 마음을 모아서 피워낼 푸른 장미 >
원래 푸른 장미는 없었다고 합니다.
장미에는 푸른 색소를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기에,
푸른 장미는 흰 장미에 물을 들여서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연구 끝에 장미도 푸른색 색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불가능'이었던 푸른 장미의 꽃말은
이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자 '기적'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의 방식들로
수원을 위한 모두의 마음을 모아서 피워낼 푸른 장미가
그곳으로 돌아갈 우리의 앞길에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