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다시는 거론할 수 없는 이름이 되어버린 레전드
염기훈은 2010년부터 2022년까지 선수로, 2023년에는 선수와 코치를 겸하는 플레잉코치로서 14년간 수원삼성의 엠블럼을 가슴에 달고 뛰었다. 그의 필살기인 왼발 킥이 발동되는 순간에 공이 골망을 흔들면 팬들은 환호했다. 그의 발끝에서 탄생한 수많은 골과 결정적 순간들은 팬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고, 그가 보여준 포기하지 않는 투지는 수원 그 자체였다.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 기둥에는 리빙 레전드(living legend)로서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팬들이 유니폼에 가장 많이 마킹한 이름도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사랑받았던 염기훈 선수에게는 축구선수에게 드물게 개인 응원가도 있었다. 2023년 하반기, 플레잉코치 겸 감독대행으로서 그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 응원가는 마치 축제의 절정이자 마무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응원가는 2023년 12월 2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불렸다. K리그1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강등이 확정된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지 않던 프런트는 염기훈 감독대행을 앞으로 내세우며 그의 손에 마이크를 쥐여주었다. 그가 모든 몰락의 책임을 뒤집어쓴 채 마이크를 든 순간, 서포터석의 트리콜로를 비롯해 일반석과 본부석에 남아있던 팬들 사이에서 “나오지 마”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팬들의 분노는 방만한 운영과 프로 감독 대신 내부 인사들을 반복적으로 기용하는 리얼블루 정책(*윤성효, 서정원, 이임생, 박건하, 이병근 감독의 연이은 부진으로 이어진 수원의 감독 인사 문제)에도 향해 있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레전드를 희생양으로 만든 그 상황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울분에 찬 서포터들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로 염기훈을 위한 응원가를 불렀다. 그 응원가에는 짧게나마 감독대행으로 분투한 그를 위로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응원가는 그날 이후 한동안 불리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5월 25일, 빅버드에서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염기훈 감독은 5월 동안 다섯 경기를 연달아 패배하며 5연패를 기록했고, K리그2에서 자동 승격의 마지막 기준이라 여겨지는 7패를 달성하고 말았다. 그날, 승격 경쟁 상대였던 서울이랜드를 상대로 이기던 경기에서 마지막 10분 동안 세 골을 허용하며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분노한 서포터들 앞에서 염기훈 감독은 결국 사퇴를 발표했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한 서포터들은 이제는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마음에 담아 마지막으로 그의 응원가를 불렀다.
염기훈 ‘감독’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2023년 12월 19일, 강등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염기훈 플레잉코치가 수원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염기훈 선수’를 사랑해 마지않던 수원 팬들뿐만 아니라 평소 수원을 좋아하지 않던 타 팀 팬들까지도 이 결정에 반대했다. 염기훈은 단 세 달 남짓 감독대행을 맡은 경력 외에는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전무했으며, 필수적인 P급 라이센스마저 정식 한국 코스가 아닌 태국 코스로 이수 중이었다. 승격이 절실한 시즌을 이런 경력의 감독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 팬들의 공통된 목소리였다.
강등 이후의 모든 사항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런트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입장을 내며 “염기훈 감독대행은 여러 후보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염기훈 '감독후보'는 이 논란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답답한 팬들은 그의 SNS에 찾아가 마음을 전하고, 구단 사무실에 근조화환을 보내며 항의했다. 프렌테 트리콜로가 성명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1월 9일, 결국 염기훈 후보의 감독 임명이 공식 발표되었다. 구단 측은 그가 선수단의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핵심 선수들의 이탈을 막고 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강등의 아픔을 직접 겪었기에 이를 해결할 의지가 강하고, 능력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배포된 염기훈 감독의 프로필 사진 파일의 생성일이 2023년 12월 19일로 확인되면서, 이 결정이 강등 직후인 12월 중순에 이전 프런트에 의해 복수의 후보 검토 없 정해졌던 사실이 드러났다.
염기훈 감독은 P급 라이센스를 취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계 훈련의 절반을 팀과 떨어져 태국에서 자격증을 이수하는 데 보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누군가를 몰아내려고 P급을 딴 것은 아니다”라는 어긋난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소문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라이센스 취득 과정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로 여겨졌다. 결국 정식이 아닌 편법으로 자격을 취득했다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가 꿈꾸던 ‘수원의 감독’이 되는 과정은 시작부터 부적절했다. 모두의 반대와 우려는 그의 리더십 과정에 정당성과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더십은 자리에 오른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리더가 신뢰를 얻고 팀을 이끌기 위해서는 과정의 공정성과 정당성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염기훈 감독은 그런 절차 없이 단숨에 자리를 차지했고, 서포터들은 그를 리더로 인정할 수 없었다.
강등이 확정된 날까지 염기훈 감독대행이 보여준 ‘지도자’의 타이틀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은 서포터들에게 실망으로 다가왔다. 프로의 세계에서 자질을 입증한 인사조차도 강등 직후의 팀을 맡기 어려운 법인데, 이제 막 증명해야 할 사람이 팀을 맡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승격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는 그의 태도와 “팬들도 이 팀을 사랑한 만큼 나도 사랑한다”는 말은 오히려 오만하게 들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온 팀을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에게 맡기는 현실이 너무나도 화가 났다. 같이 승격을 두고 경쟁할 이랜드, 부산, 경남과 같은 강팀들을 이길 전략이 “소통으로 원팀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다짐뿐이라니. 염기훈 감독의 자신감은 나에게는 오히려 무책임한 오만으로 비쳤다.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랑하는 이 팀의 미래를 담보로 내거는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프렌테 트리콜로는 강등에 대한 책임과 향후 계획을 듣기 위해 구단 측에 간담회를 요청했고, 동계 훈련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염기훈 감독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염기훈 감독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가, 시즌 시작 직전에야 갑자기 간담회를 열겠다고 나섰다. 그는 그동안 “팬들과 다른 선택이지만 내 결정이 우선”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염기훈 감독은 “외부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로 팬들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 작년에는 선수들의 사기를 이유로 블랙 드레스코드를 취소해달라고 했던 그가, 정작 이번에는 팬들의 마음을 외면한 채 본인의 선택만을 고집했다.
눈물로 호소하던 팬들을 외면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지지까지 요구하는 염기훈 감독의 모습에 나는 깊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다. 사랑하던 레전드에게서 외면당한 것도 서러운데, 감독직을 받아들이는 본인에 대한 지지까지 요구해대는 그의 태도는 견디기 어려웠다. 소통과 정당성 없이 리더가 된 염기훈 감독의 모습은 내가 직장 생활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리더십의 전형이었다.
염기훈 감독은 2024년에 부임한 이후 총 14경기에서 5승 1무 7패를 기록하고 5월 마지막 주에 사임했다. K리그2로 강등된 팀은 가급적 2년 안에 다시 승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2부 리그에 '지박령'처럼 남게 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K리그2에서 우승을 통해 바로 승격했던 팀들은 대부분 일곱 번 이하의 패배를 기록했다. 그래서 7패라는 숫자는 수원이 2024년에 승격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염기훈 감독은 리그의 3분의 1밖에 치르지 않은 5월 말에 이미 패배를 7번 기록하며 사실상 승격의 가능성을 크게 낮췄다.
염기훈 감독은 시즌 초 까다로운 팀들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며 팬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가 제가 경험이 없다고 걱정하시는데, 경험만 없을 뿐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위 팀들을 상대로 당한 5연패는 그가 결국 승격을 이끌 능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염기훈 감독이 들고 나온 전술은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양쪽 풀백이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선빵 축구’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세부 조율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염기훈 감독의 팀이 승리를 거뒀을 때는, 오히려 상대에게 점유율을 내주고 수비에 치중하다가 기습적인 한 방으로 역습에 성공한 ‘딸깍’ 축구가 통한 순간이었다.
염기훈 감독의 전술적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선수의 장점을 살린 포지션 배치 대신 어울리지 않는 포지션에 선수를 끼워 넣었고, 특정 선수들에게 과부하를 걸며 폼을 잃게 만들었다. 이는 그가 준비했던 플랜 A가 설계부터 실행까지 실패했음을 의미했다.
경기 후 선수단의 모습이 담긴 락커룸 영상에서도 그는 리더로서의 아쉬운 면모를 보였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에게 “오늘 어땠어?”와 같은 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은 그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미흡했음을 암시했다. 물론 모든 지시가 영상에 담기지 않았을 수 있지만, 반복되는 문제와 약속된 플레이의 결여는 그가 명확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심지어 핵심 선수들조차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의 피드백 부족을 드러냈다. 리더로서의 방향 제시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그가 스스로 정당성 대신 내세웠던 역량마저도 미흡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 사례였다.
염기훈 감독이 상대해야 했던 감독들은 대부분 풍부한 코칭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염기훈 감독의 허술한 플랜 A를 손쉽게 파악하고 대응했다. 그러나 염기훈 감독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선수들이 개인 능력으로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염기훈 선수 시절의 플레이는 위력적인 킥을 바탕으로 한 개인기에 의존했기에 그의 이러한 경험이 결국 팀 전체를 조율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야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초보 리더가 발휘할 수 있는 유연성마저 부족했던 것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경험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5월 첫째 주, 탄천 경기장에서 원정에서 당한 홀대보다 더 서러웠던 패배를 당했다. 간신히 서포터들에게 인사하고 락커룸으로 사라지는 선수들이 초라하지 않도록 끝까지 응원가를 불렀다. 둘째 주, 서포터석의 가장 앞줄에서 쏟아지는 비에 젖어가며 응원했지만 결국 리그 최하위였던 천안에게 패배했다. 경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염기훈 나가’를 일부 서포터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셋째 주, 우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상대 서포터들이 ‘염기훈’을 외치며 환호하는 소리에 직관메이트를 포함한 서포터들이 분노했다. 넷째 주, 아산까지 먼 길을 달려갔던 팬들은 또다시 패배를 당한 뒤 선수단 버스 앞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 그날은 모든 것이 이상했다. 경기장으로 워밍업을 위해 들어서는 주장을 포함한 고참 선수들이 머리카락이 삭발 수준으로 짧아져 있었다. 콜리더는 경기 전 선수단 입장 때마다 부르던 ‘개선행진곡’ 대신, 2023년 강등을 기억하라는 가사의 ‘무제’를 선창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하프타임에 그동안 즐겨 틀던 발랄한 아이돌 곡들 대신 이무진의 '에피소드'와 잔나비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를 연달아 틀었다. 1:0으로 앞서던 경기는 마지막 10분 동안 세 골을 내리며 충격적인 역전패로 끝났다. 원정석을 제외한 모든 관중이 빅버드가 울리도록 ‘염기훈 나가’를 외쳤다.
그 순간, 강등된 날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졌다. 응원 머플러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며 “네가 뭔데 이 팀을 망치냐고”라고 외쳤다. ‘모두가 염기훈 유니폼 한 벌쯤은 있다’는 말처럼, 참 많이 사랑받았던 그였는데. 그 마음을 짓밟고 본인의 욕심으로 팀을 구렁텅이에 빠뜨린 그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선수 염기훈’과 이 팀을 사랑했던 모든 마음이 짓밟힌 것 같아서, 이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분노에 한참을 N석에서 울었다.
버스 출입구에 서서 무작정 염기훈 감독을 기다리기 시작한 서포터 무리 속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간 반쯤 지나자, 드디어 염기훈 감독이 코치들과 구단 관계자들과 함께 입구에 나타났다. 염기훈 감독이 사퇴를 선언하는 순간, 현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작년부터 이어진 과거와의 싸움이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짧은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버스로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응원가를 불렀다.
사람들은 ‘사퇴하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응원하냐’며 ‘사이코패스 같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다른 것을 들었다. 오랜 시간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선수가 모두의 반대를 딛고 승격을 이끌어내기를 바랐던 서포터들의 마지막 예우였다. 나 또한 그 응원가를 메인 목소리로 불렀다. 그것은 내 동료들이 사랑했던 존재에 대한 존중이자, 그토록 사랑받던 존재의 추락을 지켜본 동료들에게 바치는 위로였다.
염기훈 감독의 사퇴로 강등 시즌을 상징하던 구단 인물들은 모두 떠났다. 수원은 이후 새로운 감독과 함께 2024년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그의 이름은 레전드가 아닌 ‘다시는 거론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한 그는 내게 경기장에서의 두 번의 버막(*버스 막기), 리더십에 대한 고민, 그리고 가장 쓰기 힘들었던 이 글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