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새로운 감독이 틔워낸 희망의 새싹
5월 25일, 염기훈 제9대 수원삼성 감독은 5연패 이후 자진사임했다.
5월 26일, 박경훈 수원삼성 단장은 다음 경기부터 새로운 감독 체제로 운영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감독을 선임하겠다고 발표했다.
5월 27일, 박경훈 단장이 제일기획 본사가 있는 용산에서 목격되었다.
5월 29일, 박경훈 단장은 모기업에 감독 후보군을 보고하며, 최종 결재가 나오는 즉시 새로운 감독 체제를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5월 31일, 변성환 전 대한민국 U-17세 국가대표팀 감독이 제10대 수원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6월 1일, 수원삼성 구단 유튜브에 변성환 감독의 클럽하우스 첫날 영상이 공개되었다.
6월 2일, 수원삼성은 부산과의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연패를 끊어냈다.
다섯 번의 연이은 패배 끝에 염기훈 전 감독이 물러나며, 작년 강등의 주역들이 모두 팀을 떠났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청산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기나긴 과정 동안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안고 다음 경기를 향해 길을 나섰다. 비록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지만, 불과 하루 만에 훈련을 마친 뒤 부산으로 이동한 팀이 어떤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게 된다면 우리가 강등되지도 않았겠지. 그냥 부산 당일치기 여행 중에 축구 경기가 끼어 있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직관메이트와 함께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으로 향했다. 기차로 네 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일요일 오후 원정 경기를 다녀오면 월요일 아침 출근이 얼마나 피곤할지 뻔히 알면서도, 그 길에는 어떤 기대도 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두 번이나 놀랐다. 첫 번째 놀라움은 변성환 감독의 인터뷰였다. 실패의 책임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모두가 ‘독이 든 성배’라 부르며 외면하던 자리였지만, 그는 “수원삼성의 감독이 된 것은 기적이자 축복”이라며 달리 말했다. 그의 말에서는 이 팀을 단순한 직책이 아닌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두 번째 놀라움은 그의 행동이었다. 그는 먼 길을 달려와 원정석을 채운 이천여 명의 트리콜로들 앞에 먼저 나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마치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 함께해 달라”고 몸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서포터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고, 그는 다시 한 번 원정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수원을 응원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먼저 서포터들 앞에 나선 감독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팬들을 외면하기보다 감사함과 존중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뇌리에 깊이 남았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성환 감독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전반전에도, 첫 실점을 허용한 순간에도 벤치에 숨어있지 않았다. 그는 테크니컬 에리어를 활발히 오가며 큰 소리로 지시하고 손짓으로 위치를 잡아주며,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려주었다. 5월 내내 전패를 기록하며 주저하던 선수들에게 사정없이 몰아붙이기도 했다. 경기 후 공개된 비하인드 영상에서는 하프타임 동안 “적극적으로 볼을 받다가 뺏기면 책임지면 된다. 시도를 하지 않으면 찬스도 없다”라며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은 단순한 작전 지시가 아니었다. 자신감을 잃은 선수들에게 용기를 되찾아주려는 그의 간절함이 묻어났다. 경기가 지고 있을 때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 골을 넣어 5연패의 사슬을 끊는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이 엠블럼을 달고 축구화를 신었을 때는 여기 그냥 다 쏟아부어.” 그에게 경기는 단순히 치르고 결과를 받아오는 것이 아니라, ‘수원삼성의 일원으로서 모든 것을 쏟아내는 시간’이었다. 그는 “데뷔전을 지지 않은 것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좀 화가 나기도 해”라고 덧붙였다. “경기가 1대 0일 때, 난 단 한 번도 우리가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믿고 있으니까.” 그 말속에는 자신감을 잃어가던 선수들을 다시 깨우려는 감독의 신념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날의 경기는 단순한 무승부가 아니었다. 리더의 신뢰가 선수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이 다시 걸음을 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작이었다. 모두가 외면했던 ‘독이 든 성배’를 축복과 기적으로 받아들인 변성환 감독의 말과 행동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그 어떤 전략보다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가 기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기적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그랬기에 부산의 해산물도, 돼지국밥도 먹지 못한 채 분식집들에서만 식사하며 무승부라는 결과를 들고 돌아가는 길임에도 오랜만에 설레었다.
부산역에서 대충 저녁을 마치고 나가려던 찰나,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저쪽에 선수단이 있다”는 소식을 들고 들어왔다. 마침 나가던 길이었기에 급하게 가방을 뒤져 유성매직을 손에 쥐고 빠르게 기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팬들로 붐비는 사이에서 변성환 감독을 발견하고 다가가 대뜸 사인을 요청했다. 특별히 사인받을 것이 없어서 휴대폰에 그의 사인을 받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뵈어요.” 처음 보는 팬들 사이에서 “승격시켜 주세요”나 “살려주세요” 같은 인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내가 건넨 인사가 잠시나마 그의 숨을 돌리게 해주길 바랐다.
휴식기가 끝나고 맞이한 경기는 경남과의 원정 경기였다. 창원까지 직접 가기에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해 집에서 직관메이트와 함께 조용히 중계를 보기로 했다. 리그 순위와 상관없이 경남의 거친 플레이 스타일은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수원의 축구와 늘 상극이라고 여겼기에 솔직히 패배를 예상하며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 팀이 탄탄하게 기초를 다지지는 못했는지, 후반전에는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전반전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불과 이 주밖에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선수들 사이에 약속된 움직임이 눈에 띄었고, 비록 아직 세밀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의도가 분명하게 담긴 패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놀라웠던 경기 내용 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경기 후에 공개된 비하인드 영상 속 변성환 감독의 모습이었다. 보통 교체 선수들은 전반과 후반 사이의 하프타임 동안 필드에서 본격적인 워밍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날은 모든 교체 선수들이 락커룸에 모여 전반전에 대한 리뷰에 참여하고 있었다. 공개된 영상에서는 세부적인 지시가 편집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구두로 오고 간 대화의 문맥과 보드에 표시된 위치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삽입된 영상 자료를 통해 변성환 감독의 피드백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선수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명확히 전달하려는 그의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도 경기 후 락커룸에서 그가 선수들에게 했던 말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서포터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 팬들한테, 응원해 주는 거에 익숙해지지 마. 당연한 건 없어.” 그의 단호한 목소리는 마치 서포터들의 응원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듯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라이벌 팀 팬들과 중계진마저 “저렇게까지 응원하는 팀이 강등될 수 있나”라고 말할 정도로 열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2023년 강등 후 2부 리그에서의 전반기 동안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N석 코어존에서 응원을 고집하던 나와 직관메이트조차 우리의 응원이 부질없는 것이 아닌지 고민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부임 후 고작 두 번째 경기를 치른 변성환 감독이 그 말을 해줬을 때, 그의 진심에 깊이 감사했다. 어쩌면 그 말은 그가 청소년 국가대표 감독으로 있으면서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서포터들의 존재에 대한 감사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그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응원하는 서포터들의 응원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선수들에게 일깨웠고, 비록 영상으로 전해 들은 말이지만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며칠 후에는 코리아컵 대회에서 포항과의 원정 경기가 있었다. 평일 포항에서 치러진 경기였기에 직접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만큼 여러 번 놀라운 순간들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놀랐던 것은 선발 라인업이었다. 그동안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등학생으로 준프로 계약을 맺은 선수들과 막 졸업한 어린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그러나 이 어린 선수들은 국내 최고 수준의 포항 선수들을 상대로 연장전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대등한 경기를 만들어냈다.
경기가 끝난 후 변성환 감독은 기자들에게 결과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얻은 경기였다고 말했다.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잘 준비했고, 훈련장에서 진실되게 흘린 땀을 경기장에서 증명해낸 과정이었다. 그는 첫 프로 데뷔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어린 선수들에게 “프로는 결과까지 잡아야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독려했다. 그의 모습은 단순히 경기를 ‘운용’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었다. 그날의 운영과 경기장에서 빛난 신예들의 활약을 보며, 나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다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로소 떠올리게 되었다.
코리아컵으로부터 다시 며칠 후에 바로 성남과의 홈경기가 바로 이어졌다. 지옥 같았던 5연패의 시작이 바로 성남과의 경기에서 비롯되었고, 변성환 감독의 부임 후 처음으로 홈에서 진행되는 경기이기에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경기였다. 홈 경기장인 빅버드에서는 선수단의 버스가 도착하고 선수단이 내려서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띄워준다. 카메라가 구단 버스에서 내리는 변성환 감독의 모습을 비췄을 때, 삼삼오오 응원석에 모여서 각자 이야기를 하고 있던 서포터들이 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날카롭게 각이 잡힌 정장에 파란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하고 나타났다. 팬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날이기에 정장을 입었다는 그 모습으로 새 코치진들과 센터 서클에 서서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는 그에게 원정석을 제외한 세 방향의 가득 찬 팬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서포터석에 있을 때 가장 떨리는 순간은 정적과 응원가가 뒤섞인 킥오프 직전이다. 하지만 이 날은 그 긴장감 속에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전반전이 세밀하게 이어진 공격 덕분에 1:0으로 앞선 채 마무리되었다. 킥오프 직후부터 변성환 감독과 코치들은 수원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주춤하거나 어긋나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벤치에서 뛰어나와서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후 공개된 하프타임의 락커룸에서 변성환 감독이 “추가골 더 넣어야지, 하나 넣고 끝내면 어떻게 해”라며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처럼, 수원의 선수들은 거침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를 압박했다. 후반 초반에 실수로 상대방에게 넘어갔던 주도권은 그동안 팬들에게 경기력으로 비난을 받던 김보경 선수가 오랜만에 득점에 성공하며 되찾아왔다. 그 기점으로 경기의 흐름은 완전히 수원 쪽으로 넘어왔다. 마지막으로 조윤성 선수의 세 번째 골까지 터지며, 오랜만에 3:0이라는 깔끔한 점수로 승리를 거뒀다. 4월 이후 두 달 만에 직관한 승리였고, 악몽 그 자체였던 5월을 잊게 한 승리였으며, 홈에서의 첫 클린시트(무실점) 경기였다.
서포터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응원석으로 다가오는 선수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해 보였다. 감독님은 한 줄로 서서 서포터들에게 인사하는 선수들 뒤편에 서서 함께 인사했다. 경기 시작 때는 멀끔한 정장 차림이었던 것이 무색하게, 재킷은 어딘가에 오래전에 벗어던져졌고 셔츠도 경기 중 내리기 시작한 비에 젖어 구겨져있었다. 경기 중의 답답함을 보여주듯 걷어 올린 소매 차림이었지만 그의 표정만은 밝고 여유로워 보였다. 락커룸으로 돌아간 감독은 “수원삼성 감독으로서, 나만 누릴 수 있고, 여러분(선수)들만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팬들 앞에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며, “코칭스태프 전체를 가장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수원 팬들이라고 생각해”라고 이야기했다. 오늘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때에 경기가 진행될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때로는 클럽하우스로 보내진 커피차와 같은 물질적인 방식으로도 아낌없이 응원을 퍼부어준 서포터들을 기억해 주고 함께 해 주었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응원석에서는 서포터들이 경기장에 남아서 여운을 즐기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경기 중반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를 우비를 입지 않고 그냥 맞기로 결정했던 나와 직관메이트도 뒤편에서 한창 물기를 닦아내던 중이었다. 장내 아나운서가 데이식스의 ‘Welcome to the show’를 틀었다. 워낙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한지라 ‘이것만큼은 맹세할게, 내 전부를 다 바칠게. 네 눈빛 흔들리지 않게 널 바라보며 서 있을게’라는 가사 뒤로 이어지는 후렴을 나도 모르게 따라서 부르는 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나뿐만 아니라 응원석에 남은 모두가 그 후렴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뒤편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서포터들끼리 시선이 얽혔고, 이내 모두가 뛰면서 노래를 같이 불렀다. 좌석에 남아서 깃발들을 정리하던 현장팀도 함께 그 자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뛰며 그 순간을 즐겼다.
언젠가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에 다시 하기로 했던 카니발이기에 비록 그날의 승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축하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니발이 아니어도 지금까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이지만 함께 그 순간의 즐거움을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비로소 작은 연둣빛 잎을 껍질 밖으로 내밀고 작게나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희망을 발견했다. 수원이라는 팀을 응원하고 처음 발견한 소중하고 진정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