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 이적시장, 카즈키의 트레이드와 마사의 복귀를 보며
‘낭만’이라는 단어는 물결 랑(浪)과 흩어질 만(漫)이라는 한자에서부터 이미 흐르고 흩어지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는 감정과 이상이 현실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물처럼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낭만이 분명히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발은 현실에 묶여 있었지만, 시선만은 하늘을 향해 있던 그런 날들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일이든 가능할 것 같았고, 꿈을 꾸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며 낭만은 같은 꿈을 꾸던 사람들과 그들과의 기억과 함께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 직장인이 되어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생존과 성장이 최우선이 되는 현실 앞에 낭만은 사치에 불과했다. ‘현실에 매이지 않는’이라는 사전 속 낭만의 전제조건은 프로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낭만이라는 단어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날의 잔상으로 희미해져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찾은 축구장에서 나는 다시 낭만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N석에서 서포터들이 열심히 들고 있던 대형 깃발에 적힌 ‘낭만’이라는 단어는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잊지 못했던 연인을 다시 만난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왜 이제야 나를 기억해 냈냐"고 항의하듯, 그 대형기는 내가 축구장을 찾던 첫 몇 달 동안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그 가치를 다시 만났고, 그것이 축구장의 선봉에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며 이 만남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 만난 낭만을 붙잡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2023년 7월, 난데없이 일본에서 한 선수가 수원으로 이적해왔다. K리그 최하위 팀으로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J리그를 떠나온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입단 인터뷰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선언하는 그의 말을 듣고 호감으로 바뀌었다. 첫 경기에서 상대 수비진을 파고들며 사방으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가는 그의 플레이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때마침 생일을 앞두고 있던 나는 직관메이트가 생일 선물을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카즈키 홈 유니폼!” 그렇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홈 유니폼은 남은 2023 시즌 내내 나와 함께하는 소중한 유니폼이 되었다.
‘대지를 가르는 패스’와 ‘축구의 신’으로서 찬사를 받던 카즈키 선수는 그해 9월 대전 원정 경기에서 마침내 K리그 첫 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경기는 3:1로 대패했고, 그는 자신의 첫 골을 자축하기는커녕 패배의 아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원정 응원석에서 고개 들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목이 잠겨버린 것도 기억난다.
11월에는 강등 조기 확정이 걸린 수원더비가 열렸다. 카즈키 선수는 단연 상대 진영을 흔들며 경기를 이끌어갈 핵심 선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과격한 반칙으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해야 했다. 다행히 그날 경기는 난타전 끝에 우리가 승리했지만, 그는 퇴장 후에도 락커룸으로 가지 못하고 경기장 한구석에 서서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원정 응원석 앞에서 몇 번이고 허리를 깊이 숙여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나는 그때 그저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그날 이후 우리 팀은 강등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침묵과 눈물, 분노가 뒤섞인 경기장에서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잔인하기 그지없던 겨울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껴 마지않았던 다른 선수의 이적 소식을 시작으로 그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던 날들이 이어졌다. 나를 포함한 많은 수원 팬들은 카즈키 선수 역시 떠날 거라 예상했다. 이미 여러 1부 리그 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수원과의 계약이 강등 시 자동 해지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날짜가 정해진 사형수처럼, 우리는 다가올 그와의 이별의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 있던 카즈키 선수는 재계약을 선언했다. 구단은 그의 결정을 염기훈 당시 감독대행의 설득 덕분이라 발표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팬들이 겨울 동안 흘린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그의 진심이 전해진 순간에 강등의 절망 속에서 첫 희망의 빛이 나타났다. 그래서 2024 시즌의 첫 유니폼 마킹도 주저 없이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다시 수원에서 푸른 유니폼을 입기로 한 그의 결단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이었다.
카즈키 선수는 새 시즌의 부주장으로 선임되었고, 공식 재계약 발표 후 동계 훈련에서 승격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 또한 낯선 리그에서의 출발과 승격을 위해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이 한 시즌의 도전이 낭만의 카즈키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2024년 시즌, 경기장에는 카즈키 선수의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들이 가득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수많은 카즈키 선수 유니폼은 그를 향한 커다란 기대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너무 과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염기훈 전 감독이 그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카즈키 선수는 작년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상대팀들은 그의 플레이 패턴을 완벽하게 분석해 격렬한 도발과 철저한 봉쇄로 고립시켰고, 그는 점점 지쳐갔다. 같은 팀 동료들과도 합이 맞지 않는 장면이 반복되었고, 명확한 지시가 부족한 탓인지 혼란스러운 플레이가 자주 눈에 띄었다.
2023년 수원더비와 똑같은 반칙을 저지르며 충남아산과의 경기에서도 퇴장당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무척 속상했다. 매번 그의 실수가 나올 때마다 ‘다시 하면 잘할 거야, 이번엔 달라질 거야’라고 되뇌며, 2024 시즌 카즈키 유니폼을 입고 다시 축구장으로 향했다. 문제는 염기훈 전 감독의 전술이라고, 카즈키 선수의 플레이스타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그가 고집한 ‘해줘’ 역할이 문제라고 스스로 얼마나 자주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았던 것이었을까. 변성환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고 난 후의 경남전에서의 카즈키 선수는 머리를 다듬고 염색까지 한 모습만큼이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리웠던 날카로운 패스와 키패스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를 빠져들게 했던 작년의 카즈키가 돌아온 것같아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제 변성환 감독님과 함께라면 살아날 거야.’ 그런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일주일 후 홈경기에서 다시 빛날 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주일 동안 상황은 급변했다. 코리아컵 경기를 위해 포항으로 떠난 카즈키가 어두운 표정으로 혼자 통화하고 있었다는 목격담이 팬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가 다른 팀 선수와 트레이드될 것이라는 루머가 퍼졌다. 나는 그저 지나가는 소문일 뿐이라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며칠 뒤 그의 이름이 팀 등록 명단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카즈키 선수가 서울이랜드로 이적한다는 공식 발표가 났다. 회사에서 처음 목격담을 들었을 때부터 느꼈던 불안감이 결국 현실이 되며 그의 이적 소식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함께 승격하자며 다짐했던 그였는데…!
…충격이 컸지만, 머리로는 제법 빠르게 이 트레이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카즈키 선수의 플레이스타일은 너무 명확했고, 변성환 감독이 추구하는 높은 에너지 레벨의 축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카즈키 선수도 새 전술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선수만을 위한 전술을 짤 수 없다는 걸 이해했고, 그를 트레이드 조건으로 올린 구단의 결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낭만’의 카즈키는 그렇게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채 떠나가고 말았다.
카즈키 선수의 트레이드가 완료된 후, 그는 새 유니폼을 입고 목동의 그라운드에 나섰다. 경기장에서 익숙한 모습 그대로 사방으로 패스를 뿌리며 경기를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압박을 가하는 새로운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조금만 더 일찍 이런 성장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트레이드로 그를 보내야 했던 것이 안타깝고 속상하면서도, 이제서야 성숙한 플레이를 펼치는 그의 모습에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새 유니폼을 입고 새 팀의 팬들과 함께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그가 잘 지내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전 남자친구가 새 연인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처럼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때는 나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선수가 이제는 다른 팬들과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의 새로운 팀에서의 성장은 반갑지만, 동시에 우리 팀에서 조금만 더 일찍 그런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았다. 프로의 세계에서 낭만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여름, 카즈키의 이적 후에 들려온 또 다른 소식이 있었다. 마사 선수가 J리그를 떠나 강등 위기의 대전에 다시 복귀한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대전이 K리그2에 머물던 시절, “승격, 그거 목숨 걸고 합시다”라는 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마사. 그가 처음 입단했을 때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찍은 사진을 보며 나는 그저 부러웠다. 대전에 대한 내 기억은 좋지 않았지만, 마사의 복귀는 다시 한 번 프로의 세계에서 낭만을 지키려면 그만큼의 실력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1부 리그로의 승격과 잔류라는 팀의 목표를 한 차례 달성한 뒤 본인의 도전을 위해 향했던 J리그에서 다시 팀을 위해 망설임 없이 돌아온 마사는 진정한 프로였고, 낭만을 지킬 자격이 있는 선수였다.
물론 낭만은 성적이나 결과로만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라운드 위에서 몸을 내던지며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단기적인 승리가 아닌 장기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나는 낭만을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즈키 선수와 마사 선수는 모두 나에게 낭만을 체현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회사 생활에서 느꼈듯, 프로의 세계에서 낭만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열정과 노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의 플레이와 태도는 감동적이었지만, 결국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낭만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프로의 세계에서는 실력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낭만을 지키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카즈키 선수는 2023년 겨울에 수원에 남아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2024년에는 충분한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 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다. 반면, 마사 선수는 대전에 돌아온 후 익숙한 플레이로 K리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아직 2024년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에 마사 선수의 선택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아 그의 낭만은 완성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수원의 응원가 Vamos millonarios의 가사의 일부인 “모두가 부러워할 낭만”은 결국 뛰어난 실력과 성과로 증명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아무리 소중한 가치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그 낭만조차 증명을 통해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은 냉혹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면 그 세계의 법을 따라야 하고, 이상을 현실에서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그리고 덧붙이는, 보내지 못했던 편지.
2023년 9월 대전전 이후 선수의 SNS 계정으로 보내려다가 초대가 수락되지 않아서 남아있던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카즈키 선수,
카즈키 선수가 여름에 수원삼성으로 온 다음부터 모든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수원의 한 팬입니다.
모두가 환호하는 필드에서의 플레이 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카즈키 선수의 태도와 투지 덕분에
또다시 일어서서 다음 경기를 보러 가고,
상대에 맞서 다른 많은 수원 팬들과 함께 응원가를 부르고 카즈키 선수의 이름을 외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승리가 많지 않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음번에는 분명 더 나아질 것이 있다고 믿어볼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대전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제 시선은 가장 먼저 필드 위의 당신을 향했습니다.
고개를 떨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신이 느끼고 있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마음이 참 아팠어요.
그랬기에 열심히 응원석에서 외쳐보았지만 아마 당신에게는 닿지 않았을 말이었기에,
이렇게 뒤늦게나마 전해봅니다.
낯선 리그에서의 첫 득점을 축하해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요.
당신의 최선을 다했을테니까.
힘든 경기였어요.
푹 쉬고,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다른 서포터즈들과 함께,
또다시 당신과 팀을 위해 저의 위치에서 함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