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와 패배가 교차했던 2024년 8월의 축구장에서
처음으로 수원의 서포터들과 함께했던 것은 한창이었던 카니발을 지나치지 못했던 2023년 8월의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 함께 뛰었던 그날로부터 일 년간 밀도 있게 서포팅을 했었음에도 2024년 8월에는 또다시 낯선 것들이 많았다.
수원은 잔디 공사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홈구장으로 사용해 왔던 수원월드컵경기장, 빅버드를 떠나 미르종합운동장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전 좌석과 경기장 주위의 트랙이 수원의 상징인 파란색이라는 것과 넉넉한 서포터석의 수가 마음에 들었지만, 천 대도 되지 않는 주차장과 열악한 주변 인프라는 꽤 골치였다. 덕분에 경기 시작 다섯 시간쯤 전에 가서 주차를 해두고, 이미 파란 유니폼들로 가득한 그곳의 카페나 20분쯤 걸아가면 나오는 다방 같은 동네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푸드트럭의 닭꼬치나 매점의 컵라면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경기 결과가 들쑥날쑥하기 시작했다. 미르에서의 첫 경기였던 안양전과 그다음 경기인 전남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드디어 변성환 감독님의 부임 이후 첫 연승이 나왔다. 하지만 그 기쁨과 이때까지의 열 한 경기 무패가 무색하게 바로 다음 경기인 서울 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부임 이후 첫 패배가 나왔고, 8월의 마지막 경기는 0:2로 뒤지고 있던 것을 간신히 2:2 무승부로 만들며 승점을 1점이라도 챙겨 올 수 있었다. 경기력마저 전반전과 후반전 중 한 파트만 좋은 날들이 많았기에 현장에서든 집에서든 마음 편히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찝찝한 무승부와 그래도 발전이 보였던 경기력이 있었던 6월과 7월이 나은가를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축구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경기에 함께 해주었던 직관메이트가 대학원 졸업 학기를 맞이하며 전남전을 마지막으로 남은 시즌의 직관은 쉬기로 했다. 덕분에 서울이랜드와의 경기가 있던 목동 원정부터는 혼자 경기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소모임에 속하지 않은 개인 지지자로서 서포터석의 코어에 있다 보면 서포팅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어색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낯선 것들 속에서도 트리콜로는 여전히 트리콜로였고, 나는 여전히 익숙한 푸른 물결 속에서 노래하고 뛰며 박수를 쳤다. 혼자라도 여전히 '우리'인 순간들을 통해 축구는 어느덧 내 삶에 조금 더 깊게 스며들고 있었다.
미디어팀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이틀쯤 지나면 경기 비하인드 영상을 구단 유튜브 채널에 올려주었다. 경기장에서의 열기를 다시 상기시켜 주는 영상들은 모든 부분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경기장의 서포터의 위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기 전과 하프타임, 그리고 경기 후의 락커룸의 모습에 주목하는 편이다. 여름과 함께 새롭게 부임한 변성환 감독님의 철학은 나와 결이 같은 부분이 많아 더 유심히 보게 된다.
8월 첫 경기였던 안양전의 락커룸 영상은 “축구라는 게임은 실수의 게임이야. 절대 완벽할 수가 없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열렬히 물개박수를 쳤다. 영상을 보기 전에 우리 선수들의 실수에 대해 직관메이트와 이야기하던 중에 내가 했던 말과 정확히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수하는 것에 대해 부담 갖지 말고, 도전하는 거에 더 집중하라고. 실수하면 그냥 가서 책임지면 되고, 동료와 같이 싸우면 돼.”
연구직으로 일하다 보면 완벽하지 못한 결과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잦다. 수많은 실패 끝에 단 한 번의 성공을 기다리는 연구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내게 도전 자체에 집중하라는 감독의 말은 그 말은 축구에만 국한되지 않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어진 그의 말 역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실수해도 괜찮아. 단! 바보같이 경기하지 말고 냉정하게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자기 포지션에서 충분히 즐기란 말야.” ‘즐기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그 흔한 말속의 ‘즐기는 사람’은 단순히 기분 좋게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냉철하게 실현해 내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경기인 전남과의 경기 전 락커룸에서 “싸워야지 즐길 수 있는거야.” 라는 감독님의 말에서 정답을 확인하며 내 답에 괜스레 뿌듯했다.
8월의 마지막 경기였던 충북청주와의 경기 비하인드를 통해 공개된 감독님의 락커룸 연설은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탄을 자아냈다. 충북청주의 모두가 수비를 하는 '텐 백'과 거친 플레이를 통해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게 만드는 전술은 이미 유명했다. 역시나 전반 막판에 우리는 연이어 두 골을 허용하며 0:2로 끌려갔다. 선수들의 경기력은 집에서 중계를 보고 있던 나조차도 하프타임 락커룸이 터져나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이후 공개된 영상 속의 하프타임에는 카메라가 차마 들어가지 못한 '원정팀 락커룸'이라고 쓰여있는 문과 감독님의 외침만이 담겨 있었다.
“야! 아니 진짜 공 이렇게 찰 거야? 책임감이 아무도 없어가지고 어떻게 하냐고!” 처음으로 듣는 분노로 인해 갈라진 감독님의 목소리였다. “10대 0으로 져도 좋으니까 할 거 하라고. 공 잡으면 무서워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다 피해 다니고 있어. 이거밖에 안 돼? 내가 책임진다고! 뭐가 무섭냐고 지금. 아니, 운동장에선 살아 있어야 될 거 아냐. 아 진짜 창피해가지고 못 보겠네, 밖에서. 너희 이 기회가 소중하지 않니? 다시 한번 얘기할게. 5대 0, 10대 0으로 져도 돼. 내가 책임져! 우리 거 하라고! 우리 거 하고 지자고. 쪽팔리지 않게 지자고!” 그의 분노는 단순한 실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주어진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한 선수들에 대한 절박한 경고였다.
경기 전 감독님은 “프로는 기회라는 거 쉽게 오지 않아.”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두 달 만에 다시 기회를 얻은 이종성 선수를 언급했었다. 그 말에 결연하게 주장 완장을 차고 나갔던 이종성 선수마저도 하프타임 락커룸 연설에 충격을 받은 듯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완장을 매만지며 그라운드로 향했다. 하지만 후반전의 이종성 선수는 그라운드 위의 캡틴으로서 선수들을 끊임없이 독려하며 끝까지 싸웠다. 경기 중 상대의 반칙으로 머리에 출혈이 발생한 탓에 붕대를 감고 뛴 뮬리치 선수의 투혼은 패배를 무승부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경기가 끝나고 수원의 선수들이 모여있는 락커룸에서 이어진 감독님의 말은 숨이 막힐 정도로 날카로웠다. “기회라는 건 쉽게 오지 않아. 그 기회 받아서 순간, 착각하는 순간 그냥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얘기를 했는데, 마음까지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아. 경기 좀 뛰니까 프로축구가 좀 쉬운 것 같지? 그냥 경기장에 들어가는 게 조금 노력하면 경기를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지?” 영상을 통해서 그 말을 듣고 있는 나조차도 숨소리조차 크게 못 낼 만큼 매서운 말들이 쏟아졌다.
“힘들어? 힘든 것보다도 기회 못 받는 게 더 고통스러울걸? 뒤에서 경기 따라가지 못하고, B팀에서 훈련하고, TV로 지켜보고, 이기는 거 밖에서 박수치고. 이게 훨씬 고통스러울거야. 내가 운동장에 들어가서 힘든 거 그거 아무것도 아냐. 프로는 기회 절대 쉽게 주지 않고, 기회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구나 다 노력한다고. 누구나 노력해. 노력 안 하는 사람이 있나? 기회 쉽게 주지 않아. 기회 왔을 때 미친 듯이 잡으라고. 미치자고, 우리. 미치지 않으면 절대 바꿀 수 없어.”
감독님의 말은 그 순간에 락커룸에 앉아있었던 선수들 뿐만 아니라 며칠 뒤의 나에게도 닿았다. 나 역시도 직장인이라는 타이틀 속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프로로서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붙잡고 있었을까. 예고 없이 찾아올 기회를 잡기 위해서 나는 정말 매 순간을 소중히 대하고 있었던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답했던 '진인사대천명, 인데 진인사가 앞에 붙는'이라는 내 좌우명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정말 진인사를 다하고 있었던가?
경기장에서 만난 프로들은 주어진 기회를 잡고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당장 8월의 첫 경기였던 안양과의 경기에서의 한호강 선수가 그런 모습이었다. 수비수 네 명중 두 명인 양쪽 풀백은 쉴 새 없이 위쪽으로 올라가며 공격을 돕고 있었고, 파트너인 장석환 선수는 올해 데뷔한 신인이기에 그는 경기 내내 수비를 이끌며 고군분투했다. 치열했던 안양과의 경기가 승리로 끝난 후, 한호강 선수는 그로서는 처음이었던 팔 위의 주장 완장을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잘 버텼습니다, 이거 때문에.” 전신인 LG 치타스 시절부터 이어진 오랜 라이벌인 안양과의 경기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관례처럼 이날도 서포터석 앞에는 승리를 기념하는 치토스 과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전의 김현 선수처럼, 한호강 선수도 치토스를 먹는 세레머니인 '치레머니'를 했다. 치토스를 허공에 잔뜩 던지고 받아먹으며 모두의 박수를 받던, 나 역시도 앞쪽 서포터석에서 보면서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한호강 선수는 훈련장에서부터 이날 경기장에서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안양전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바로 그동안 영상에서만 보이거나 시즌 초반에 교체 키퍼로서 벤치에만 있었던 써드 키퍼인 조성훈 선수였다. 주전 골키퍼 양형모 선수의 부상으로 세컨드 키퍼였던 박지민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다. 하지만 경기 시작 3분 만에 안양의 공격을 막다가 부상을 입었고, 조성훈 선수가 다급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구단 영상 속에서 매번 “성훈이에요”라고 밝게 웃으며 등장하고, 벤치에 있을 때라도 크게 소리 지르고 팔을 휘두르며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을 응원하던 조성훈 선수는 후반전 시작과 함께 교체 투입되며 드디어 수원에서의 데뷔전을 치렀다. 경기 후 구단 카메라를 발견한 그는 평소와는 달리 '성훈이에요'를 외치지 않았다. “너무 뛰고 싶었는데… 1위 팀과의 중요한 경기였는데 팀이 승리해서 너무 좋고, 다음 경기도 뛸지 안 뛸지 모르겠지만 잘 준비하겠습니다. 성훈이에요. 성훈이 오늘 이겼어요.” 항상 웃음만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서 이날만큼은 아련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영상 속에서 보니 어쩐지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잡은 기회를 소중히 여겨준 모습을 가장 많이, 그리고 절실하게 보여준 사람은 변성환 감독 본인이었다. 부임 직전에 5연패를 하던 팀을 부임 후 10경기 무패로 만들어낸 것에 대하여, 그는 “이기지 못한 부분이 화가 나고, 뒤집지 못해서 비긴 부분도 화가 나있고... 개인적으로, 그래서 솔직히 거기에 감흥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리그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안양과 전남을 잡아내며 부임 후 첫 연승을 거두고서는 기자회견에서 연승의 기쁨을 말하는 대신 “오늘 경기는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이기고 싶어서 제 축구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고 결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불편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들을 통하여 감독님은 프로의 고뇌와 승리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영화 '관상'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모습으로 입장을 위해 지나갔던 서포터석 앞에 패배라는 결과를 들고 돌아와서 인사하던 때에도 그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패배의 책임을 피하지 않고, 선수단과 함께 원정석의 난간 자리까지 가득 메운 서포터들에게 인사한 그는 이내 뒤돌아서서 울분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 모습은 원정석에서 아쉬움을 갈무리하려던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직장인으로서든, 연구자로서든 아직도 스스로가 프로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말했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고 돈을 받으면 본인이 좋든 싫든 프로다'라는 내 정의상 나는 프로가 맞다. 프로라는 존재들은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지만 결과로만 평가받기에, 승리나 성공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지치기 쉽다. 나는 나조차도 모르기 어느새 십 년이 되어가는 생활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넘겨버린 하루하루는 사실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지나가버린 기회들을 아쉬워하기보다, 나는 앞으로 올 기회들을 어떻게 하면 잡고 그때에 증명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내게 떠오른 것은 축구장에서의 순간들이었다. 공을 잡았을 때 혹여나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면 결국 패배로 이어질 뿐이었다. 쪽팔리지 않게 지기라도 하려면 결국 하려던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 부담 가지지 말고, 도전하는 거에 더 집중하라고. 실수하면 가서 그냥 책임지면 되고 동료와 같이 싸우면 돼. 1대 1도 해보고 슈팅도 때려 보는 거야.”라고 안양전 경기 전의 감독님 연설처럼. 그렇게 하다 보면 소중한 기회를 내가 도전하고 증명해 내는 순간으로 만들어서 마침내 승리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8월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 글을 쓰면서 다짐했다. 잊지 말자, 프로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