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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Jan 02. 2022

[뮤지컬] 뭐하십니까? 안 찍고!

뮤지컬 <박열> 온라인 중계 후기 (김재범/이정화/김용국)

  그동안 독립운동가들을 모티브로 삼은 서사들은 영화가 되었든 드라마가 되었든 많이 접해 왔었다. 그런데 여타의 작품들과 <박열>은 그 결이 좀 다르다고 느꼈다. 박열과 후미코가 독립운동가임과 동시에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저항의 주 대상이 일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지만, 그들의 투쟁을 추동하는 힘은 나라와 민족이 아닌, 그것보다 더 상위의 존재인 '인간'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을 상대로 싸운다.



  아나키스트가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싸우고자 하는 게 '정부'라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이해다. 권력이라고 언급은 되지만, 박열과 후미코가 부정했던 것은 인간에게 차등을 두는 모든 것들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국가라는 체제가 인간을 차별한다. '사회적 지위'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더 높은 자리, 혹은 더 낮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식민지배는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조선인을 학살해도 죄가 되지 않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아무도 그 목숨값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짓밟을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것인데, 감히 그걸 허락하려고 하는 모든 존재들에 두 사람은 맞서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굳건한 믿음은 일제에 체포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도 그들에게 비범하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일본 법정에서 조선의 옷을 입고, 박열은 시종일관 그들에게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 검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 듯한 그들의 사투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죄인의 옷을 입고 법정에 명령하기에 이른다.


"불령선인의 명령이다. 우리를 사형하라!"



  두 사람은 한바탕 축제를 벌였지만, 불꽃놀이는 결국 어둠 속에서 사그라든다. 그들은 유폐되었고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사모대관과 치마저고리 자락을 휘날리며 우산 없는 춤을 추었으나, 그마저도 결국 일제가 짜 놓은 판 위에서만 출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식민지인과 그들에게 동조한 자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었다.


  후미코는 스물 셋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죽음은 아직 사인이 규명되지 않은 의문사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극에서는 일본에서 밝힌 자살설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자유를 위해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보여준 죽음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숨을 쉬는 것만이 삶이 아님을 알기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서도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박열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았다. 부정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지독하게 버텨낸 그에게 귀한 보상과도 같다. 그리고 재혼한 후에도 매 해 후미코의 제사를 챙기며 그가 계속 기억될 수 있게 했다. 방식이 달랐든 어쨌든 그들은 억압과 탄압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최고 가치였던 자유의지를 잃지 않고자 했다. 적어도 극 속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비참했음에도 충만했을 것이다. 불꽃 같았던 후미코의 죽음도 박열의 생존도 그 자체로 존엄하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와 서사들이 실화와 실존인물을 모티브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창작물들은,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접근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이젠 광복 이후의 시간이 식민지 지배의 기간보다 훨씬 더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일제강점기는 집단적 트라우마로 아직도 그 상흔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엄습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나라가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하나뿐인 목숨을 휴지조각처럼 버려가면서까지 그런 싸움에 뛰어들게 했던 걸까. 이렇게 시작한 생각의 편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결국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하는 상투적인 물음까지 떠올리게 되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저렇게 할 자신이 없다는 결론에 귀결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잘 타고난 덕분에 드러나지 않았던 내 부끄러운 단면을 기어코 목도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한다. 애국심을 고취해야 한다는 식의 국뽕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계속해서 듣고,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박열과 후미코는 역사 앞 위인으로서의 면모보다든 자기 앞에 죄인 아닌 자로 우리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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