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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l 19. 2021

내가 15살 때 쓴 글

낮잠

1988년 2월, 엄마는 나이 40이 되던 해에 나를 낳았다. 누나와는 15살 차이. 늦게 본 아들이 당신이 살아 있을 때 결혼이나마 일찍 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나를 1987년 2월 생으로 호적에 등록했다. 그때만 해도 출생 신고가 수기로 이루어지던 시절. 1년 늦게 출생 신고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동사무소 직원이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또래들보다 2살이나 어린 셈이었다.

난 또래들보다 늘 느리고, 굼떴다. 성적도 뒤처졌다. 힘겹게 주변을 따라잡으며, 내 마음을 그들에게 억지로 맞추던 시절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고1이 되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과는 뿔뿔이 흩어져,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동네의 고등학교에 가게 됐다. 낯선 공간에 낯선 존재가 가득했던 낯선 시간들.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적응하기 위해 무척이나 고군분투했다.

2002년 9월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유인물 한 장을 들고 오셨다. 담임 선생님은 그 유인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채 게시판에 턱 하고 붙이셨다. 우연히 쉬는 시간에 그 게시물을 보게 됐다. 그 유인물은 당시 부산대학교에서 개최하던 효원 문예백일장 안내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 문예 대회가 무척이나 많았다. 효원 문예백일장도 1000명가량 참여하는 대규모 백일장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책을 꽤 즐겨 읽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그때만 해도 책 대여점이 있어서 싼 값에 좋은 책들을 빌려 볼 수 있었다. 고1, 15살의 나이였지만 홍세화와 박노자, 피에르 쌍소의 책을 무턱대고 빌려 읽었다. 나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글이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했을까. 문득 그 백일장에 참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첫 백일장이었다.

10월의 어느 날, 부산대 넉넉한 터에 앉아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원고지 두 장을 빼곡히 채워 나갔다. 제재는 낮잠이었다. 지난 경험과 내 안에 쌓인 글을 엮어 15살의 서툴고 성긴 언어로 풀어냈다. 그리고 당선됐다. 1000명이 넘게 참가한 대회에서 16명 안에 들었던 것이다. 제일 낮은 상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글을 꺼내 볼 때마다 글이 존재를 담아내는 그릇임을 깨닫는다. 이 글엔 15살의 작고 작은 내가 있다. 여리고 여린 손으로 삐뚤삐뚤 글을 쓰던 내 모습이, 생각을 가다듬고 문장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내 표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그때의 감정이 선연히 떠오른다. 아마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담은 단어와 문장에 과거의 내가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일요일 오후의 낮잠은 달콤합니다. 몸의 상태가 나른해지고 온몸의 신경이 둔화된 것 같은 느낌이 손끝에 전해 올 때쯤, 쏟아져 오는 잠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권태와 게으름, 나른함과 편안함이 낮잠에 모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분은 평상시의 복잡한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이라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가 봅니다. 일요일만이 아니라 한가한 시간에 자는 낮잠은 평소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느낌으로써 더욱더 달콤한 것일까요.

  전 초등학교 시절 낮잠을 많이 잤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맞벌이를 하셨던 까닭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게 좋았습니다. 어쩌다 가끔 부모님께서 일요일에 함께 하실 때에는 꼭 두 분을 방으로 데려와 저와 함께 낮잠을 자도록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그 시간만큼은 어떠한 시간보다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방에서 따뜻한 체온을 나누다 보면 꼭 어머니 뱃속에서 양수의 움직임과 함께 했던 기분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뱃속에서 느꼈던 기분과 낮잠의 기분을 비교하는 것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딱히 그 느낌 말고는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그런데 낮잠에서 깨어나 거울을 쳐다보았을 때, 부스스한 머리와 초점 없이 흐린 눈을 가진 제 자신을 볼 때면 피식 웃음이 나곤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어두운 방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더듬더듬 건드려 보다가 부모님의 몸을 건드렸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나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왠지 모를 그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왠지 세상은 나를 받아들여 주고 있지 않다는 느낌, 나 혼자 떨어져 소외된 것 같은 침울한 기분들이 늘 저를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어머니의 품속에 제 얼굴을 파묻곤 했습니다. 제가 그런 느낌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질 때마다 어머니는 그런 저의 기분을 아시는지 저를 꼬옥 안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내리쬐는 햇살의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아무도 없는 무의 공간에 빠져 드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품속에 제 얼굴을 파묻으며 편안함을 느끼는 일들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왠지 어쭙잖게 커버린 머리가 부모님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서서히 지워나가면서, 제 상처는 제가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 책이 제 가슴속에 와닿은 이유는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했던 낮잠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제가 어릴 적 낮잠에서 느꼈던 권태, 게으름, 편안함, 나태함을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세상을 느리게 살라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 파스칼처럼 피에르 쌍소도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낮잠에서 오는 무의미한 권태, 게으름, 나른함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라는 뜻이었을까요. 그러나 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따뜻했던 부모님의 체온, 따스했던 오후의 햇살과 함께 해야 하겠지요. 이제 그만 초등학교 이후로 닫아놓았던 그 마음의 통로를 열어볼까 합니다. 나른한 오후, 다시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어머니의 품속에 제 몸을 맡기며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모님의 상처도 치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저의 진실한 대화의 통로였던 그 낮잠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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