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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l 20. 2021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화 퇴고하기 수업

6월의 어느 날, 대화 수업을 위해 많은 대화 이론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만큼 필요 없는 여백을 줄여가며 A4 2 바닥 분량의 빽빽한 학습지를 완성했다. 꼼꼼하게 학습지를 읽으며 수업 시나리오를 구상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부드럽고 달콤한 어휘로 서로를 어루만지던 순간부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거칠고 날 선 언어로 상대의 마음을 할퀴던 순간까지. 기쁘고 슬픈 모든 순간마다 내가 내뱉은 언어가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학생들이 대화의 이론을 배우고, 문제를 많이 푼다고 한들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줄인 여백만큼이나 학생들의 삶으로 채워야 할 빈 공간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수행평가를 마련했다.


우선 학생들과 과거의 대화 방식을 성찰할 수 있는 한 편의 글을 천천히 읽었다. (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대화에도 퇴고가 가능하다면’)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이유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제일 인상 깊다고 생각한 문장을 골라 그 이유를 소개했다. 그 문장은 바로 ‘그 일에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였다. 용기가 없어서, 자존심이 상해서, 지는 게 싫어서 사과하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수행평가의 제목은 ‘용기를 가지고 지난 대화를 퇴고하기’가 되었다.

http://ch.yes24.com/Article/View/44880


이어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대화 방법을 정리해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김중수의 ‘교사를 위한 대화법’)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902240


그리고 우리가 한 시간 동안 하게 될 수행평가를 설명했다.


첫째, 친구, 연인 부모님과 대화하면서 후회했던 순간을 생각하기

- ‘가까운 사람일수록 친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을 내뱉게 되지. 어떤 관계든 관계가 주는 적절한 긴장감이 사라지게 되면, 경계가 쉽게 무너지는 법이니까. 가까워지는 관계만큼이나 우리의 말도 부드러워지면 좋을 텐데. 친하지 않은 주변 사람에게는 좋은 말을 해주다가도, 소중한 사람한테는 거칠고 날카로운 언어를 쓰는 건 삶의 아이러니인 것 같아. 문득 집으로 돌아와 지난 대화를 돌이켜 봤을 때, 그 장면이 떠오르고 약간의 아쉬움이 생긴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기억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면서, 후회했던 순간을 찾아보자’


둘째, 왜 후회했는지 그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 ‘며칠 전, 몇 주 전 혹은 몇 달 전의 나를 지금의 나 앞에 세워 보자. 그리고 그때의 나를 다른 사람 보듯이 관찰해 보는 거야. 내가 왜 저렇게 이야기했을까? 내 표정은 왜 저럴까? 그리고는 상대방의 얼굴도 들여다보자. 내 말과, 목소리, 움직임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는 거야. 그럼 내가 왜 후회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돼.


셋째, ‘내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과 같은 지점을 발견하기

- ‘대화가 어긋나는 건 한 순간인 것 같아. 무심코 내뱉은 단어, 문장이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그 지점을 찾아보자. 내가, 혹은 상대방이 이렇게만 말했더라면 하는 순간을 발견해 보자.’


넷째, 수업 시간에 배운 대화의 이론, 원리 등을 적용해 지난 대화를 수정하기

- ‘수업 시간에 엄청 많은 이론을 배웠지? 적절한 거리 유지의 원리, 공손성의 원리, 각종 격률들. 이 이론이 이론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대화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만들어 보자. 그러면 앞으로도 말을 할 때 자연스레 이 이론들을 사용해서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야.’


마지막, 자신의 대화 태도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점을 생각해 보기

- ‘마지막으로 우리의 평소 대화 태도를 반성해 보자.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대화할 건지 고민해 보자.’


사용한 학습지는 아래와 같다!


한 남학생의 투박하지만 진솔한 기록을 여기에 남겨 두어야겠다. 나머지 학생들도 곧 정리해야지!


1. 친구, 연인 부모님,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후회했던 순간을 생각하기

엄마 : 공부 좀 해라. 맨날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고 고2 맞나?

나 : 어 맞아

엄마 : 시험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맨날 놀고만 있노?

나 : 좀 이따가 할 거야

엄마 : 매일 잔소리하는데도 바뀌는 게 없네. 자존심도 안 상하나? 나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공부하겠다.

나 : 자존심 상할 게 뭐가 있어? 자존심 별로 안 상하는데?

엄마 : 에휴


2. 왜 후회했는지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자존심이 상했다. 상했지만 이기려고 자존심이 안 상했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면 재미있다. 그런데 안 해도 재미있다. 공부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난 아직 꿈이 없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나갈 동기가 없어 그런지 더 공부를 안 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저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긴 한다. 자존심이 안 상한다는 말보다 공부를 안 하게 되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하고 후회된다.


3. ‘내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과 같은 지점 발견하기

부모님이 먼저 왜 공부를 안 하냐고 먼저 물어봐줬다면, 아니면 내가 먼저 내 고민에 대해 말했더라면 서로 좋게 좋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수업 시간에 배운 대화의 이론, 원리 등을 적용해 대화를 수정해 보기

엄마 : 공부 좀 해라 맨날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고 고2 맞나?

나 : 이거 조금만 하다가 공부할게(태도의 격률)

엄마 : 시험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맨날 놀고만 있노?

나 : 이것만 하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나빠. 앞으로 공부 언제 할 거야?라고 먼저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 (나 전달법)

엄마 : 맨날 잔소리를 해도 바뀌는 게 없네. 자존심도 안 상하나?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공부하겠다.

나 :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면서) 자존심 상하지. 그런 말을 들으면 누가 자존심이 안 상하겠어? 지금부터 공부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가 줄래요? (적절한 거리 유지의 원리)


5. 자신의 대화 태도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점을 생각해 보기

상대방이 기분 안 좋게 말을 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거나 내 감정을 숨기지 말고 이러이러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현해야겠다. 그리고 그런 말을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뒤,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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