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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Aug 18. 2021

수업 시간에 번지점프를 하다

화법과 작문 수업 첫 시간

2001년, 중학교 3학년. 그 당시만 해도 비디오 대여점이 무척이나 많았다. 500원, 1000원, 2000원을 주고 일정 기간 비디오를 대여해 주는 가게였다. 개봉 시기가 빠를수록 가격은 비싸고, 기간은 짧았다. 인기 있는 영화는 금방 동이 나곤 했다. 오래된 시간은 낮은 가치로, 낮은 가치는 헐값으로 매겨지는 곳이었다.

당시 이병헌, 이은주 주연의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가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당시 씨네 21, 무비스트 같은 영화 잡지를 즐겨 읽던 나는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했지만, 평단에게 호평받았던 그 영화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간 비디오를 운 좋게 빌릴 수 있었다.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었을까.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 영화를 보면서 눈에 깊이 담아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내가 교사가 된다면 꼭 첫 수업을 저렇게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이병헌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분필로 칠판 끝에서 끝까지 긴 선을 긋는다. 학생들을 바라본다.)

이병헌 : 이게 뭐냐?

학생 1 : 낙서요. (일동 웃음)

이병헌 : 지구다. 이 지구 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 상의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인연이란 게, 좀 징글징글하지?


인연을 설명하는 숱한 명언들이 있지만, 지구,  바늘, 밀씨라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사소한 단어로 인연을 눈앞에 펼쳐내듯 그려내는 장면이라니. 어린 나이에 그 장면을 여러 번 되돌려 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10년 동안 수업을 하면서 첫 수업의 마지막은 늘 저 영화의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오늘은 <화법과 작문>의 첫 수업 시간. 교실에 들어가 출석부를 집어 들고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마스크에 가려진 나머지 얼굴을 상상한다. 눈빛과 이름만으로 그 학생의 존재를 담으려고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얇은 마스크 한 겹이 존재와 존재의 두터운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서글퍼진다. 그리고는 내 소개를 한다. 이름, 나이, 학교, 학과, 거쳐온 학교, 내가 낸 책과 논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연락처까지.

이어 깨알 같은 글씨로 줄이고 줄여 여백 하나 없이 빽빽하게 채운 학습지를 나눠준다. 학습지에는 고심해서 고른 3편의 글이 담겨 있다. 이기주의 <언어의 언도>, 홍승은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 언어의 온도는 너무 차갑거나 뜨거웠던 우리의 언어 온도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 홍승은의 글은 몇 가지 단어로 납작하게 눌린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부풀려 보자고 이야기한다. 김하나의 글은 내 언어와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을 갖자고 이야기한다.

3편의 글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게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을 고른 이유를 작성하게 한다. 이어 자신이 생각하는 잘 말하고 잘 써야 하는 이유를 기록하게 한다. 어느 정도 작성이 끝나면 휴대폰을 꺼내 들고 패들렛에 접속해 자신의 의견을 적어 온라인 게시판에 올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나는 학생들의 의견을 빠르게, 하지만 신중하게 읽는다. 모든 학생의 의견을 하나씩 읽고 피드백해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하나의 의견을 선택해 내 목소리로 읽어 주고 그 의견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렇게 수업을 진행하면 끝에 딱 1-2분이 남는다. 그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장면을 소개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중학교 때부터 간직해 온 교사라는 꿈과 이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교실 속 풍경을. 그리고 우리가 맺은 인연의 기적을. 기억하건대 이 시간만큼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은 없다.

수업은 하나, 둘, 셋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로 끝이 난다. 그 끝이 시작이 된다. 모든 인연이 시작과 끝, 끝과 시작으로 이어지고 맺어지듯 우리의 만남은 반복된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도 언젠가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끝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무한한 되풀이와 영원한 만남을 꿈꾼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있을 마지막 만남을 준비한다. 만남과 헤어짐, 그 길에 놓인 걱정과 두려움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의 너희를 대한다. 그리고 내가 맺은 모든 인연을 소중하게 쓰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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