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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Apr 10. 2022

기억의 복원

 아이폰 다이어리에는  시간 간격으로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전형적인 J 나는 매우 사소한 일정까지도 기록하는 편인데, 가령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 주문한 물건의 예상 도착 날짜 같은 하찮은 일정도 나에겐 빼놓을  없는 기록의 대상이 된다.

나쁜 기억력 때문에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건 아니다. 나는 술에 취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혼란의 밤을 시간과 장소, 특유의 분위기와 말 한마디까지 짚어가며 정확하게 그려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희미하게만 남았을 잔상을 세밀하게 채색해 복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공유된 기억이 누군가에게 추억으로 새겨지는 모습을 보곤 한다.

가끔씩 주변 친구들이 묻곤 한다. 그렇게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상이 귀찮지 않냐고, 스스로를 옭아매듯 규율하는 삶에 지치지 않냐고 말이다. 쉽게 부정하지 못할 이 피곤한 습관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할 중요한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잊어도 좋을 사소한 기억을 치열하게 기록해, 결국 흘려보내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쉽게 흘려보내는 기억이 많을수록,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오랫동안 담아둘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억을 담을 마음속 여유를 항상 넉넉하게 비워두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모두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지나간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산다. 때로는 누군가의 망각이 나의 기억이 되기도, 누군가의 기억이 나의 망각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르게 적힌 추억의 흔적에 오해와 상처가 쌓여 서로를 밀어내는 슬픔은 얼마나 가슴 아픈가. 그래서 우리에겐 기록이 필요하다. 버릴 기억과 간직할 추억을 가려내기 위해. 쉽게 잊어서는 안 될 너와 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힘껏 붙잡아야 할 우리의 찰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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