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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Apr 20. 2022

혁오의 톰보이

2교시 수업시간, 어려운 수능 문제 풀이 수업을 하다가  학생에게 시선이 꽂혔다. 학생은 눈을 내리깔고 책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자리를 옮겨 다시 보니,   귀에  에어팟을  옆머리로 가리고 있는  아닌가.


지문 설명을 끝내고 문제 풀 시간을 1분 정도 준 뒤, 살며시 그 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내가 오는 걸 알고 학습지로 책상 위를 살며시 덮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학습지를 치우니 역시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휴대폰 속 영상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TOMBOY’를 열창하는 혁오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 대놓고 휴대폰이라니’ 순간 당황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 낮은 목소리로 학생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휴대폰을 압수했다. 학생은 죄송하다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을 복도로 불러 오늘 하루 동안 휴대폰을 압수하겠다고 하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문득 궁금했다. 수업 시간에 들을 만큼 그 노래가 그렇게 좋은가?


‘근데 그 노래 좋아? 아까 듣던 혁오 노래’

‘네 선생님 좋아요 한번 들어 보세요’

‘그래 알았어’


하루 종일 수업하랴, 일하랴, 운동하랴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혁오 생각이 났다. 유튜브를 켜서, 노래를 재생했다. 노래는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에 어색해’라는 가사로 조용히 시작한다. 아 이 노래 참 좋구나. 엄마가 베푼 사랑에 어색한 아이, 슬픈 얼굴을 하며 뒷걸음질 치는 어른,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는 우리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노래라니. 혁오의 거칠면서 단단한 목소리에 이른 나이에 벌써부터 노곤해진 청춘의 모습이, 헤어진 연인을 향한 짙은 아쉬움이 부드럽게 겹쳐 흐른다.


정말 내 취향의 노래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런 노래도 듣게 되는구나. 그 아이가 수업 시간에 휴대폰을 하지 않았다면 이 노래를 들을 기회는 영영 없었겠지. 내가 그 순간 화를 내며 감정을 쏟아냈다면, 이 노래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라고 생각하니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잘했어 형성아. 인생에 한낱 도움 되질 않을 수능 문제 풀이 수업, 듣기 싫을 수도 있지. 좋은 노래 듣고, 좋은 풍경 보며,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살면 그게 인생의 전부지라고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행복했다고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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