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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러드 다이아몬드가 괜찮다는데요?

저출산 이야기에 뜨끔한 비혼 주의자

by 글적글적샘

‘이번에 통계청이 아주 속된 말로 구라를 쳤더라고요. 평균 출산율을 1.02로 잡고 2050년 인구를 예상했던데요? 저출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냐면요. 지금 연금 수급 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이상 저희 연금은 정말 없다고 봐야 하는 거예요’


교육청 독서토론대회에 사용할 책을 선정하는 회의에서 갑자기 출산율이 화두에 올랐다. 생산 가능 인구가 감소하면서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몫이, 아니 짐이 커져 간다며 한 젊은 남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속으로 ‘저 선생님은 결혼하셨겠지? 그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지, 심각한 건 알겠는데 제발 나한테 결혼했냐고 묻지 마라, 제발’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 2년가량 이 모임에 참여했지만 서로 그다지 친하지 않은 덕에 사적인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업무적인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나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분주하게 일하는 직원을 향해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다른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이 젊은 선생님의 출산율 이야기가 끝이 나질 않는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다. 드디어 일론 머스크가 한국의 출산율을 걱정했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아, 그런데 며칠 전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한국의 저출산은 오히려 미래의 기회라고 하더라구요. 이미 세계에는 수많은 인구가 있고, 동일한 재화를 적은 인구가 나눠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한 개인이 생산 가능한 가치가 앞으로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저출산을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더라구요.’


참지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석학까지 인용하며, 저출산에 기여(?)하는 나 같은 비혼주의자를 위해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음 선생님,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인구 그래프를 그려보면 역피라미드 꼴로 노년 세대가 많아지게 될 텐데 그분들이 고부가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을까요?’

‘아, 그런 관점도 있군요.’ 같은 대답이 나오겠거니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나라 걱정을 하신다. 이쯤 되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결혼과 출산으로 화제가 넘어가기 전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순간 머릿속에 결혼과 출산, 육아를 소재로 하는 숱한 예능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으리으리하게 넓은 집에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이모님 몇 분은 계실 듯한 연예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눈에 그려진다. 그러다 우리 이혼했어요에 출연해서 엉엉 우는 연예인 부부들이, 제대로 양육받지 못해 부모와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상담하는 오은영 박사님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나지 못해 힘겨워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난, 불화, 욕설이라는 얼룩이 덕지덕지 붙은 내 유년 시절이 눈에 고인다.

결혼과 출산, 양육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넷플릭스의 <솔로지옥>에서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한 삶은 지옥이라는 은유가 널리 울려 퍼졌는데, 비혼은 그 지옥보다도 더 낮은 등급의 삶일까? 커플들은 모두 천국도를 향해 나아가던데, 출산과 양육이 시작되는 순간 그곳은 천국일까 또 다른 지옥일까? 비혼의 삶은 천국도와 지옥도를 벗어난 외딴섬 같은 인생이려나? 그곳에서 난 행복할까?


회의가 끝나고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 한 분이 결국 나에게 결혼은 했냐고 묻는다. 아직 하지 않았다 하니, 빨리 하는 게 어떻겠냐 하신다. 애를 낳고 기르다 보면, 가르치는 학생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마음은 내 자녀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가장 잘 알 수 있다며.


‘네네 선생님, 그러게요. 부모가 돼 봐야 내 자식 예쁘다고 싸고도는 부모의 마음을 알 텐데 그렇죠?’ 라며 능글맞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어색한 미소로 대신하고 말았다. 나이가 들수록 빈말, 예의, 겉치레에 미숙해진다. 표정으로 드러나는 마음을 숨기기가 힘들다.


그러면서 또 속으로 중얼중얼거린다. 정말 결혼과 출산, 양육을 하면 내가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까? 아이들과 덜 싸우고,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으며 참 교사의 삶을 살게 될까? 그런데 주변의 결혼한 선생님들이라고 아이들과 잘 지내지는 않던데, 그럼 그분들은 대체 왜 그런 거지? 정말 경험이 우리가 마주할 세계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는 하는 걸까?


이렇게 따박 따박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적당히 예의를 지킨 인사를 하고 내 갈 길을 갔다. 그래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사는 사람 없지, 다들 숨겨두고 가려둔 마음이 있는 법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글로 꾹꾹 눌러 담는다. 글로 눌러 담아도 흘러서 넘치는 진짜 속마음은 가끔만 표현해야지. 그때도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석학을 들먹이며 나 같은 비혼주의자를 위해 그나마 세련된(?) 변명을 늘어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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