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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는 삶, 이름

by 글적글적샘

“형성평가 한번 풀어보세요.” 2012년, 첫 발령을 받아 가르치던 해, 수업을 듣던 아이 몇 명이 키득키득 웃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김형성 선생님이 형성평가를 풀라고 하는 게 마냥 웃긴다는 아이들. 그 순간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던 학창 시절의 내가 겹쳐 떠오른다. 그 당시 모든 과목의 교과서에 형성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곤 했다. 선생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 몇 명이 고개를 돌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시답잖은 웃음이 먼지처럼 나풀거리던 시절, 그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을 거쳐 지금의 나도 어느덧 경력 9년 차, 30대 중반의 교사가 됐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이 모양 형(形,) 이룰 성(成을)인 줄로 알지만, 나는 거푸집 형(型)을 쓴다. 융해된 금속을 일정한 틀에 담아 하나의 형상으로 만드는 과정에 빗대어, 본보기 혹은 모범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부모님께 내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지어온 것인지를 물어본 적은 없다. 누군가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라는 당신들의 뜻을 담으셨겠거니 으레 추측할 뿐이다. 다만 누군가에게 수만 번 불렸을 내 이름이 현재의 내 직업과 호응하고 있음을 생각하다 보면, 그 우연이, 그 일치가 자못 놀랍게 다가온다.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리는 삶을 강요당하는 건 부담이다. 누군가의 본보기와 모범이 되라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삶을 겪어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겐 지각하지 말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며, 자신의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하고, 타인의 험담을 함부로 늘어놓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난 자주 지각하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특정인을 신나게 험담한다. 부모님은 착한 사람이 되라며 나를 교회에 보내셨지만, 대학교에 진학한 뒤 내가 제일 좋아한 철학자는 니체였다. 신은 죽었으니, 피안을 바라보지 말고, 대지에 발을 디딘 채 본능에 충실한 춤을 추라는 그의 이야기는 주변의 바람과 시선 때문에 놓쳐버린 내 지난 욕망을 매만지게끔 한다. 대학 시절 한 번도 하지 않던 염색을 30대 중반인 지금 이 시기에 한 것도, 학생의 모범과 본보기가 되길 바라는 주변의 바람과는 조금은 다른 삶의 결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동음이인들은 어떤 삶의 결을 풀어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호명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이 일치하고 있을까? 다들 표면과 이면이 달라 생기는 긴장감에서 비롯된 삶의 아이러니로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불리는 이름과 살아내는 삶의 불일치가 유발하는 미묘한 긴장을 끌어안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들으며 위로받고 싶다. 누구나 기대되는 대로 살아가지는 않는다고, 몇 개의 어휘와 단어로 납작하게 눌린 삶이 힘겨워서 조금씩 튀어 오르는 입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의 의미로 구획되지 않을, 다의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이다. 선생님들께 묻고 싶다. 선생님들은 호명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같으신지, 그 결이 달라 힘들고 지쳤던 적은 없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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