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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와 체벌, 그리고 홈페이지

by 글적글적샘

2002년, 집과 멀리 떨어진 사립 고등학교를 다니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이었다. 당시에는 0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07:40분까지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50분. 지각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면 최소 6시 20분에는 일어나야만 했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0교시 수업을 듣고, 7시간의 정규 수업에, 8교시 보충 수업, 거기다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고 나면 학교 밖 공간에서 햇빛을 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침밥은커녕 화장실을 갈 시간도 없어 만성 변비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데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신동엽의 느낌표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침밥을 못 먹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밥차를 준비하는 코너가 생겼던 것이다. 당시 아침밥은 단순한 밥이 아니었다. 한국 교육의 과도한 경쟁을 은유하는, 인간다운 교육을 주장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해당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사회적 화두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0교시 폐지 운동이 일어나 0교시는 폐지되었다. (실제적으로 0교시가 폐지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등교 시간이 20분가량 늦춰진 변화는 어린 나에게는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후로도 느낌표 프로그램은 제도권 내, 밖의 청소년을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공익 예능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때라 해당 프로그램은 높은 시청률과 함께 따뜻한 사회적 메시지를 쏟아낼 수 있었다. 불량 청소년으로 낙인찍힌 폭주족 청소년들에게 헬맷을 씌워주거나,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할인제도의 신설을 주장하는 등등. (이 방송 프로그램으로 학생증이 아닌 청소년증이 만들어졌다.) 그 당시 사회 규범으로 정상 청소년의 범주에서 살짝은 비껴 난 이들을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선한 믿음과 올바른 움직임이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나는 학교가 아닌 TV를 통해 배웠던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교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교사의 과도한 체벌과 경직된 교직 문화가 가끔씩 뉴스에 오르내릴 때였다. 해당 방송 내용에 많은 학생과 시민이 공감했다. 그런데 반감도 상당했다. 지금이야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 인권은 말 그대로 바닥을 쳤다. 교사의 반말이 교권으로, 체벌이 사랑의 매로 치환되던 시대에 존댓말 사용은 교권을 추락시키는 행위였다. 상하 수직의 위계질서가 학교라는 공간을 견고하게 지탱하던 시기. 교실 속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된 시기에, 그래도 나는 교사를 꿈꾸며 살았다.

그러던 2003년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야간 자율학습 시간. 여느 때처럼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던 나는 뒤에 앉아 있던 두 친구의 속닥거림을 들으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구둣발 소리를 따각따각 내며 교실에 들어온 감독 선생님이 떠들고 있는 학생 두 명을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두 명의 친구가 본인 앞에 서자마자 들고 있던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고, 구둣발로 학생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큰 고함 소리와 욕설이 조용한 교실 복도를 거칠게 때리며 울려 퍼졌다.

‘저렇게나 화내면서 때릴 일인가.’ 친하지도 않은 학급 친구의 일이었지만, 무심코 넘어가면 될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러기 싫었다.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 순순히 침묵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교사라는 미래를 꿈꾸면서도 시대와의 불화를 경험하는 나에게, 반복되는 체벌의 광경은 무서운 지루함이었다. 선한 믿음과 올바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날, 9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 당시 학교 홈페이지는 말 그대로 진공이었다. 학생 게시판에 급식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 한 두 가지가 올라오는 게 다였다. 익명제라는 방어막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IP 추적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선한 믿음과 올바른 행동이 내가 속한 공동체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설렘 속에 글쓰기 버튼을 클릭해 차분하게 글을 써 나갔다.

글 중간중간에 느낌표 프로그램의 내용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아침밥과 존댓말, 학생 인권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두 단어를 되짚으며, 과도한 체벌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정중하게 지적했다. 글을 다 쓰고, 퇴고에 퇴고를 거쳐 글을 올린 시각은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잠을 청했고, 난 또 6시 30분에 기상해 학교로 향했다.

그날 오전의 학교는 조용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풍경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오후에 들어오신 선생님들마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에 대해 한 마디, 두 마디씩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글을 쓴 취지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선생님도 계셨고, 체벌은 교육이자 교사의 권리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홈페이지의 글은 꽤나 유명해져서, 전교생이 다 읽었을 정도였다. 민망한 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글을 쓴 당사자가 나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교생이 1000명 정도 되는 남학교에서 백일장에 나가 열심히 상을 타 오던 학생은 나밖에 없었고, 그 학생이 당시 교실에 있었으므로 그 정도 추측은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올린 건 아니었지만, 막상 암묵적으로 밝혀지고 나니 혹시나 나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오지나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내리지는 않았다. 두려움보다는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접속한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는 순간, 내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딱 한 달 뒤, 학교 홈페이지가 익명제에서 실명제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내 글은 삭제돼 있었다. 학교 홈페이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공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허탈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18살 어린 나이, 처음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도전해 첫 패배감을 맛봤달까. 한동안 멍하니 학교 홈페이지를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10년도 넘게 지난 과거의 추억을 되살린 건, 며칠 전 자율활동 시간에 아이들에게 보여줬던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영상 때문이다. 짓밟힌 학생 인권을 되살리긴 위한 긴 역사의 시간을 지나, 교권과 학생 인권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영상 내용에 심드렁한 학생들을 바라보며, 좋은 시대에 태어난 학생들이 부럽다는 은근 꼰대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 변화가 생기는 데 이토록 많은 시간이 필요했구나. 겹겹이 쌓인 노력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지금, 이곳의 학생들이 바라는 변화는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나는 그 변화를 지지하기 위한 선한 믿음을 심어주는 교사일까.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는 있을까. 우리의 교실과 학교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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