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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n 10. 2022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글쓰기 수업

 제목이 너무 거창하지만,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작년에 설득하는 글 쓰기 수업을 하면서 겪었던 고민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올해는 대선과 같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글 쓰기 주제가 풍성해졌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몇 가지 주제로 학생들의 견해를 물어보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물론 서로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달라야만 한다. 그런데 구성원 대다수가 하나의 입장에 치우친 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이때 나는 국어교사로서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물론 국어 교과는 내용을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다.  블로그나 각종 연수에 등장하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지나친 내용 편향 수업에 크게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교실에서 인권, 평등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뒤로 밀려나는 상황은 심히 걱정스럽다. 특히나 생각의 다양성(diversty)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니. 가령 한 반의 학생이 30명이라고 가정하면, 노키즈존에 찬성하는 학생이 20명,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낮추는 것에 찬성하는 학생은 28명, 여성가족부 폐지에 찬성하는 학생은 27명... 이런 식이다. 자신들과 접점이 없는 특정 성별, 연령대의 타자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엄격한 판단의 잣대를 들이미는 아이들에게서 가끔씩 무서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왜 그렇게 생각해?'라는 나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주장(claim)은 넘쳐나지만, 이유(reason)와 근거(evidence)가 사라진 시대. 아마도 내 고민은 내 입장과 반대되는 학생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유와 근거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 학생들이 걱정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업에서 교사의 가치를 주입할 수는 없다. 작년에는 똑같은 고민을 하다가, 내 목소리를 최대한 숨긴 채 수업을 진행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내 목소리를 드러내고는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맥락 없이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다. 모든 수업은 성취기준과 학습목표에 초점을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득하는 글 쓰기에서 중요한 '논증'이라는 개념과의 연결고리, 즉 맥락을 만들었다. 자신의 주장은 반드시 논증하되,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증거를 의식적으로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사고의 균형과 확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올해 수업 역시 작년과 마찬가지로 [토론의 입론 학습 - 반대신문 학습 - 모의평가 및 수능 문제 풀이 - 실제 온라인 토론(수행평가)  - 설득하는 글 쓰기 이론 학습- 모의평가 및 수능 문제 풀이 - 실제 설득하는 글 쓰기(수행평가)] 순서로 진행했는데, 설득하는 글 쓰기 이론 수업을 하면서 '논증(argument)의 중요성'과 관련해 다음 2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일부만 올리는데...  혹시나 이것도 안되는 거면 바로 지워야지 ㅜ_ㅜ)




<설득하는 글 쓰기 수행평가 1차시 수업 자료>


유시민의 글 쓰기 특강 중  '주장은 반드시 논증하라'


‘나는 장동건을 대한민국 최고 미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주장이다. 따라서 논증해야 한다. 장동건을 최고 미남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나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이 주장은 보통 이런 식으로 논증한다. 먼저 미남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고 장동건의 얼굴이 다른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그 기준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럴 경우 다른 사람은 그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고 반박할 수도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미남의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기준을 제안하는 것이다. 미남의 기준은 받아들이면서 반박할 수도 있다. 예컨대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이 장동건보다 더 정확하게 그 기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장동건을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자기의 주장을 논증했기 때문이다. 그가 애초에 아무런 논증도 하지 않은 채 장동건이 최고 미남이라고 주장만 했다면 어땠을까? 근거를 밝히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결국 논증하지 않은 주장은 반박할 수 없고, 그런 주장은 주장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논증하지 않고 주장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불행하게도 흔히 있다. 사상과 이념이 다른 사람에게 일단 ‘종북’이나 ‘수꼴’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극우 극좌의 ‘자칭 논객’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수준 있는 언론 매체에 기고하는 지식인, 전문가, 칼럼니스트도 논증하지 않은, 그래서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을 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논증 없는 주장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살았다. 사실과 논리에 입각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 크고 힘센 쪽이 이기는 현실에 익숙하다. 권력자들은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로 합당한 논증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핍박했다. 시민들은 정책의 타당성을 논증하려고 애쓰는 대통령을 ‘말이 많다’고 비난했다. 부모들은 꼬박꼬박 어른한테 말대꾸한다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자녀를 혼냈다. 교사와 교수는 질문하는 학생을 귀찮게 여기거나 구박했다. 심지어는 국가정책을 다루는 정당들까지도 사실과 논리와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에 편승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논리적인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논증의 미학이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하고 논증 없는 주장을 배척해야 하며 논리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미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논증의 미학을 애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격한 논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논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벌 총수들은 ’회장님 지시 사항‘의 문제점을 논증하려는 회사 간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정책 방향의 타당성 여부를 논증하려고 드는 공무원을 좋게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 원리를 깊이 인식하고 존중하려는 사람이라야 논증의 미학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논증을 위한 토론 그 자체를 없애버리려 하고 논증하려 애쓰는 사람을 배척한다. (후략)



이 글을 읽으면서, 주장을 논증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주장은 반드시 논증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쓴 글도 함께 읽었다. 설득하는 글 쓰기를 잘 하려면 '훌륭한 생각, 사람다운 감정을 지니고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옳다고 여기는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 유시민의 책 내용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글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같이 읽었다.


https://blog.naver.com/gudtjd1004/222679678003



여기까지가 논증(argument) 수업! 토론 수업을 하면서, 주장, 이유, 근거를 엮어 쟁점별로 논증을 구성하는 기술적 방법을 가르쳤다면, 이 글을 읽으면서는 논증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순서가 좀 뒤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이어서 귀납 논증, 연역 논증 같은 논증 도식 같은 걸 가르쳐볼까 싶었지만, 작년에 가르쳐 보니 아이들이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실제 잘 써먹는 것 같지도 않아서 고민고민하다가 바로 설득 전략으로 넘어갔다. ( 논문에서는 논증 도식 중심의 글 쓰기 지도가 엄청 효과적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내가 아직 논증 도식 가르칠 만한 수업 자료가 없어서일지도 ㅜㅜ)


다음 수업의 주제는 '이성적 설득 전략과 감성적 설득 전략'. 학생들의 글 쓰기를 지도하다 보면 정말 무미건조한 글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각종 사실 논거와 의견 논거를 뒤섞어 무조건 내 말이 맞아!라고 웅변하듯 소리지르는 글들. 교과서에 실린 글들은 매우 전형적이다. 모의평가와 같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글들만 읽혀서는 좋은 글 쓰기 지도를 할 수 없다. 특히 글 쓰기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 특히 감성적 전략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동일한 주제, 동일한 입장으로 집필된 두 편의 글을 각각 읽혔다. 주제는 노키즈존과 페미니즘. 학생들에게 사고의 균형과 이후에 배울 '논증의 요소(반론 예상과 반박)'를 위해 대다수 학생의 입장과 상반되는 글을 수업 자료로 쓰고 있다는 점도 알려 주었다.



<설득하는 글 쓰기 수행평가 2차시 수업 자료>


노키즈존과 관련된 한겨레 21의 글 일부 (이성적 전략)


(전략)


엄마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독박육아’를 강요당하는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공간은 집 근처 카페나 음식점을 제외하면 대형마트, 백화점, 키즈카페가 전부다. 한국의 도시 구조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지 않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가 2015년 발표한 논문을 보면, 유모차를 사용하는 영·유아 양육자 240명은 △대중교통 편의성 △보행로의 품질 △건물·시설 접근성 등 ‘유모차 통행 환경’에 대해 5점 만점에 불과 1.52점을 줬다. 당시 이 연구를 수행한 오성훈 연구위원은 “유모차를 동반한 외출에서 육아 전담자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결국 그의 사회적인 고립감과 제약감 등을 증가시킨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금기의 장소가 늘어난다면 엄마들은 집에 틀어박혀 산후우울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중략)


‘맘혐’ 앞에선 모든 곳이 노키즈존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노키즈존은 차별적 공간이다. 영업 방침을 정할 사장의 자유, 대가를 지급한 시·공간을 방해받지 않을 소비자의 자유, 타인을 싫어할 개인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지만, 이들에게 소수자를 거부·분리·배제할 권리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과)는 “유흥업소 등 어린이의 출입금지가 정당화되는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소수자 특성을 지닌 특정 연령대의 출입을 집단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법상) 차별 행위가 될 수 있다”며 “조용한 콘셉트의 레스토랑이라면 시끄러운 아이나 부모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방법을 찾는 게 맞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이들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흡연실처럼 키즈존, 금연실처럼 노키즈존을 따로 두는 ‘구별’은 차별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금연실이 늘어난다고 흡연자를 차별하는 사회적 흐름이 더 세질 가능성은 낮지만, 노키즈존이 늘어나면 아이나 엄마에 대한 차별이 더 강화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저자인 손희정 문화비평가는 노키즈존으로 선뜻 발을 내딛기 전에 이런 물음표부터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차별을 통해 쾌적함을 추구하는 노키즈존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뭔가를 결정할 때가 올 거다. 그때 서로 불편을 감수해가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간편하게 불편을 제거하는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불편’이 될 수 있으므로.


한겨레21 ‘개는 되지만 아이는 안 됩니다.’ (서보미 기자, 2017.08.21.)


노키즈존과 관련된 전이수의 글(소중한 사람에게) 일부 (감성적 전략)

(전략)


난 안다. 엄마의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우태의 슬픔은 내 마음도 엄마의 마음도 아프게 했다. 우태는 돌아가는 내내 “먹고 싶어! 아무 말 안 하고 먹으면 되잖아.”하고 울었다. 조용히 우태를 안아 주는 엄마의 눈에도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어른들은 조용히 있고 싶어 하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 어른들은 잊고 있나 보다. 어른들도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빠에게 질문하는 아들의 대사가 생각난다.


“아빠! 왜 개와 유대인들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


- 전이수, 『소중한 사람에게』 中



페미니즘과 관련된 정희진의 글(페미니즘의 도전)의 일부 (이성적 전략)


제주도 사람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내일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의 관점은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피해’ 집단도 가장 광범위하다. 또한 성차별은 다른 사회적 억압의 모델을 제공하여, 사회적 약자는 여성으로, 강자는 남성으로 성별적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후략)


페미니즘과 관련된 최승범의 글(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일부 (감성적 전략)


(전략)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뭐 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텔레비전 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혼자요?”하고 물으면 다시 “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속상하고 죄송했지만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곁에 있을 수 없었고,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 저녁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마치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그 이야기를 꽁꽁 싸매고 감춰두었던 것처럼, 지금 전화하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을 것처럼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고 나면 어머니가 느낄 먹먹함이 전해져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떠올리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또렷이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배 속에서 느껴졌던 희미한 태동, 간신히 울음을 달래 재웠을 때의 안도감, 열이 떨어지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던 어느 밤, 엄마를 부르며 아장아장 걸어오던 순간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던 한 생명체가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는 것을 인정하며 축복까지 해야 하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자식들을 키워낸 후 많은 어머니들이 우울증에 걸린다. 수십 년 동안 좇았던 삶의 목적이 일시에 사라지자 거대한 허무가, 정체성의 혼란과 자아의 붕괴가 몰려온다. 자아실현의 욕망을 거세당한 어머니들이 자식 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경로가 자식의 성공뿐이었던 현실에서, 자신의 삶과 자식의 삶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그들을 조롱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어두컴컴한 텅 빈 집에 홀로 앉아 자주 지난 삶을 돌아봤다. 거기서 가엾은 여자아이를 만났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했던, 고단한 삶에 지친 아이를.




이성적 전략을 사용해 작성된 글을 읽고 난 뒤에 학생들의 소감을 물으면 역시나 예상한 대로 '맞는 말인 거 같은데 반박하고 싶다, 너무 논리정연해서 오히려 공감이 가지 않는다' 등등의 대답이 나온다. 문제는 학생들도 이런 글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수사학을 인용할 것까지도 없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글 쓰기 수업을 지도하는 교사들도, 글을 쓰는 학생들도 이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실제로 감성적 전략으로 작성된 글을 읽고 나서는 학생들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진다.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정희진의 글보다는 최승범의 글이 학생들에게는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간다. 엄마의 희생과 고생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주제이니까. 남학생들도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에, 여성가족부는 무조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경력 단절 여성, 성범죄 피해자, 어머니의 희생 등을 이야기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해당 글 4편을 다 읽으며 이것저것 학생들에게 설명하다 보면 50분이 금방 흘러간다. 이어 학생들에게 설득하는 글을 쓰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근거를 수집하되, 내 글을 읽는 독자가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 감정을 건드려 보자라고 이야기한다. 다음 수업 시간에 실제 설득하는 글 쓰기를 위한 계획 단계에 돌입해 보자며!


후 드디어 설득하는 글 쓰기 수행평가 돌입! 계획단계에서는 주제와 입장 결정하기, 설득력 있는 (타당성, 공정성, 신뢰성) 논거를 수집해 보기로 한다! 제시된 주제 말고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긴 했는데, 대다수 학생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주제를 고르는 것 같다. 사실 학생들이 정말 정치, 사회에 큰 관심이 없구나 깨닫는 지점이 바로 이 순간이다. ㅜ


<설득하는 글 쓰기 수행평가 3차시 수업 자료>


학생들에게 주제를 고르고 주제를 선택한 이유, 입장을 갖게 된 이유를 물었다. 작년에는 바로 주제, 입장을 결정하고 글 쓰기를 하도록 지도 했는데, 왜 이런 주제와 입장을 선택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 보는 단계가 있어야 글이 더욱 더 탄탄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이성과 감성을 균형적으로 건드릴 수 있는 설득 전략을 수립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2)을 좀 어려워 했는데, 돌아 다니면서 예시를 들어주니 금방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 글을 한번 봐야겠지만 ㅜ) 아래 글은 내가 썼는데... 너무 잘 썼다.. 후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리와 감성이 모두 필요하다. 다양한 사실, 의견 근거를 활용해 이유, 주장을 합리적으로 논증하는 것도 효과적이지만, 때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섬세하게 고려하고, 설득을 위해 상대방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근거들을 찾아보자.


이어서 이유와 근거 수집하기! 학습 목표가 자신이 수집한 논거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이라, 타당성, 공정성, 신뢰성 항목에 체크리스트로 표시한 다음 최소 O가 7개 이상인 논거만 글에 활용하자고 이야기했다. (해당 학습지에 들어가는 모든 내용은 구글 클래스룸으로 받는다)




4차시 수업에서는 글의 구조를 결정한다. 되도록 문제 해결 구조의 글을 써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하기는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형식의 글을 쓰고 싶은 학생들에게 교과서 학습활동에 제시된 글의 형식(서-본-결 구조의 5-6단락 형식)을 따라 써 보라고 추천했다.


<설득하는 글 쓰기 수행평가 4차시 수업 자료>

이어서 상대방의 반론을 예상하고 반박하는 내용을 떠올려 보라고 지도한다. 학생들의 글 쓰기에서 제일 중요하면서도 제일 많이 놓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사고의 균형을 강조했다. 공정성과 관련된 항목이기도 하고. 논증의 바이블(?)이라고 알려진 조셉 윌리엄스의 <논증의 탄생>을 참고했는데 어색한 번역투가 많아 문장을 조금 가다듬는 수준에서 인용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학생들이 꽤나 이 부분을 잘 적는 것 같았는데 실제 글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기대하는 중이다.


다음 수업 시간에는 내가 만든 설득하는 글 쓰기 루브릭으로 작년 선배의 글을 함께 평가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일단 수업 기록은 여기까지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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