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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Mar 06. 2023

젊음의 노트

   “형성아, 부산에서 전국 노래자랑 예선을 하고 있다는데... 어디서 하고 있노?”  

   

  노래자랑 나가보라고, 요즘 같은 시대에 엄마는 젊은 편이라고 채근하듯 닦달하는 내 말에도 늘상 거부하던 엄마였다. ‘나처럼 늙은 사람은 이제 그런 곳에 나가면 안 된다.’, ‘사람들이 흉본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무슨 말이고? 요즘은 세련된 노인들이 환영받는 시대다.’라는 내 말을, 엄마는 결코 믿지 않았다. 박막례, 밀라논나와 같은 유튜브를 보여주며 엄마를 설득해도, ‘저런 사람은 엄마랑 다르잖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KBS 전국 노래자랑 예선이 궁금했을까.


  엄마는 젊은 시절 가수를 꿈꿨다. 이곳저곳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고, 우연히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곡을 받는 건 곧 데뷔를 뜻했다. 그런데 곡을 받으려면 30만 원이 필요했다. 엄마는 돈이 없었고, 5남매의 맏이였다. 꿈을 포기한 대가는 끝없는 동생들의 뒷바라지였다. 그 시절 여자들이 다 그랬듯, 엄마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엄마는 당신의 청춘을 노래가 아닌 매일매일의 중노동으로 채웠다. 그러다 한량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누나와 나를 낳았다. 


  엄마는 뒷바라지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됐다.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밤늦은 바닷가에서 커피와 폭죽을 팔았다. 그렇게 새벽 늦게까지 노동하면서도, 1주일에 두 번은 일찍 일어나 곱게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었다. 민락동 MBC, 남천동 KBS의 노래 교실을 꾸준하게 다녔다. 각종 라디오 방송과 주부 대상의 노래 경연대회에도 꾸준하게 나갔다. 나갈 때마다 상을 탔고, 부상으로 세탁기와 냉장고, 각종 상품권을 받아왔다. 노래는 엄마의 여가 생활이자, 생계에 보탬이 되는 유용한 장기였다. 자연스레 집안엔 늘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엄마의 목소리와 겹쳐 울려 퍼졌다. 엄마는 패튀김 노래를 자주 들었다. 패튀김 노래에는 깊은 슬픔이, 아픔이 있다고 했다. 패튀김의 목소리를, 그녀의 우아함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를 벅스 뮤직에서 반복 재생해 달라고 했다. 컴퓨터를 만지지 못하던 엄마는 늘 듣고 싶은 노래를 나에게 부탁해 들었다. 그 노래를 노래 경연대회에서 부를 거라며 몇 날 며칠을 연습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그 노래엔 선명한 비유가 빛나는 가사가 있었다. 잡히지 않는 젊음의 무지개를 아쉬워하며, 비어있는 젊음의 노트에 무엇을 써서 채워야 할지 고뇌하는 한 청춘의 울림이 있었다. 안갯속을 걸어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빈 가슴을 부여잡으며 슬퍼하는 한 청춘의 방황이 있었다. 어느덧 청춘을 훌쩍 넘겨버린, 50이 넘은 나이에 엄마가 부르는 젊음의 노트에는 묘한 분위기가 녹아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사랑하던 엄마가, 어느 순간 노래를 멈췄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나이가, 늙음이 부끄럽다고 했다. 거기다 코로나 19로 모든 노래 교실이 문을 닫자, 엄마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어느 순간 엄마의 빈 시간은 유튜브와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이제 엄마는 KBS의 TV 가요 무대가 아니라 미스터 트롯과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 그렇게 사랑하던 패튀김의 자리를 송가인과 임영웅이 대신한 지 오래다. 가끔 엄마와 보는 TV 속 젊은 트로트 가수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다채로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조명 아래, 그 누구보다 환한 젊음을 자랑하며 트로트를 부르는 어린 가수들이라니. 당신도 부득부득 우겨가며 자신의 꿈을 지켰다면, 저렇게 환화게 빛났을까?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짙은 어둠이 깔린 바닷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결국 엄마는 전국 노래자랑 예선에 나가지 못했다. 이미 예선을 보려는 인원들이 많아 더는 추가 신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무척 아쉬워했다. 문득 궁금했다. 당신의 늙음을 탓하며 그만뒀던 노래를 왜 다시 시작한 걸까. 이유를 물었지만, 엄마는 그저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답했다. 언제나 그랬듯 엄마의 선택과 결정은 복잡하지 않았고, 이후의 결심은 항상 단단했다. 꿈을 포기한 채 집안의 생계를 선택했을 때도, 그 이후의 삶에서도. 나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KBS 전국 노래자랑 홈페이지를 들락거린다. 언제 있을지 모를 예선 일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2023년 3월 25일, 영도에서 KBS 전국 노래자랑의 예심이 열린다.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카톡으로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다짐해 본다. 이번엔 엄마 손을 잡고 함께 가야지. 채우지 못하고 덮어야 했던 젊음의 노트, 뒤늦게라도 그 여백 속 한 줄을 같이 채워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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