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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n 13. 2021

남성에게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2019년 10월쯤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2학년 독서 과목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연구부장님이 교실 문을 열고 다급히 나를 찾았다. ‘김샘, 잠시 나올 수 있어요?’ 수업 중인 교사를 급히 호출하는 일이 드물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나갔다. 연구부장님은 복도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남성에게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라는 문장이 있는 글을 시험문제로 출제한 적 있어요?     

  2019년 5월, 부산교육연수원에서 주최한 국어 교사 전문성 신장 연수에 참석했다. 당시 서울에서 비문학 수업으로 유명한 한 국어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선생님은 본인이 비문학 수업을 할 때 사용하는 자료집을 나누어 주시며, 마음껏 쓰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자료집에 나를 사로잡는 몇 편의 글이 있었다, 그중 한 편이 바로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이었다.    

 


  제주도 사람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내일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의 관점은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피해’ 집단도 가장 광범위하다. 또한 성차별은 다른 사회적 억압의 모델을 제공하여, 사회적 약자는 여성으로, 강자는 남성으로 성별적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미술 작품 제목을 보자. 로댕의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앵그르의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다. ‘유관순 언니’가 아니라 ‘유관순 누나’이다. 이처럼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

  말 자체가 여성 혹은 남성에게만 해당하거나 여성 비하적이어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차별)를 규정하고 당연시하는 경우도 많다.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걸레’는 남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정숙한 여성’이라는 말은 있지만 ‘정숙한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영웅’은 여성을 뜻하지 않으며, ‘변태’는 이성애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다. 남성이 연상이거나 상위인 것은 그동안 당연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른다. 살인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폐습을 굳이 ‘사상’이라고 칭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는데도, 외화 번역 자막에 남성은 여성에게 반말을 쓰고, 여성은 남성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성차별이다.

  ‘성매매’는 윤락(淪落)→매춘(賣春)→매매춘(賣買春)→성매매(性賣買)로 변화해 왔다. 이 용어들은 지금도 말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혼용되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의 생산과 사용은 정치적이며 말의 변화 자체가 인권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폐경보다는 완경, 처녀막이 아니라 질주름, 삽입 성교보다는 성기 결합, 미혼(未婚)보다는 비혼(非婚)이 듣기에도 좋고 상호적이지 않은가.

  이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 성차별적 언어들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단지 개별 단어의 표현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 사유 방식의 변화까지 동반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 정희진, 「말과 성차별」(『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언어에 덧씌워진 의미를 벗겨내고, 그 안에 입혀진 편견을 지우려는 글이었다. 주류의 언어로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 차별과 폭력임을 밝히는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2학기 독서 첫 수업 시간에 활용했다. 이 글로 글을 읽고 질문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을 면밀하게 골라내 의도와 의미를 파악하는 연습을 시켰다. ‘왜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까? 성매매라는 단어는 왜 여성 인권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까?’처럼 글쓴이가 애써 설명하지 않은 빈틈을 본인의 사유로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삽입과 흡입’의 차이처럼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그려질 문장에는 사실 눈이 가지 않았다.

  당연히 해당 지문을 시험문제로도 출제했다. [왜 우리는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까?]. 접두사의 의미 차이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설명하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미성숙, 미해결, 미완성처럼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할 당위로서의 미래를 드러내는 접두사 ‘미-’는 결혼을 사회적 의무로 인식하는 편견이 덧씌워져 있으므로, 현상에 대한 중립적인 부정의 의미를 드러내는 접두사 ‘비-’를 써야 한다‘는 게 모범 답변이었다. [성매매라는 단어는 왜 여성 인권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까?]라는 문제에는 ’여성의 성을 ‘춘’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치환하고, 성을 파는 행위만을 강조하는 ‘매춘’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며, ‘성’을 사고파는 사람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성매매’라는 단어가 현실을 왜곡하지 않은 단어다‘라는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점수를 위한 글이지만, 그 글이 다수의 삶에 가려지고 숨겨진 그늘과 같은 삶을 향한 위로임을 알기 바랐다.

  연구부장님은 잠시 교장실에 내려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학생인지, 학부모인지, 학원 선생인지 모를 누군가가 내가 출제한 시험문제에서 ‘남성에게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라는 부분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학교 시험에 이 같은 문장이 포함된 글을 출제하는 게 교육적인가?’라며 JTBC에 제보했다고 한다. JTBC 기자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학교에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 전화를 교장 선생님이 받게 되신 거였다.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기자와 직접 통화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기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질문인지 상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행동을 문제 삼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 글을 다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수업 시간에 다룬 교육적 의도를 찬찬히 설명했다. 전화를 끊으니 교장 선생님도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셨다. 이 글을 어디서 발췌했는지, 수업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다루었는지 등을. 긴장되고 떨렸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은 내 설명을 듣고 나를 위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해 주셨다. 본인이 판단하기에 이 글과 선생님의 수업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나를 다독여주셨다. 직접 교육청 공보관실에 전화해 이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청 차원에서 언론사와 직접 이야기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러나 기자는 나와 직접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학교에 찾아오기를 원했다. 교장 선생님은 기자가 오면 잠시 교장실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기자가 와서 이것저것 물으면 난 뭐라 대답해야 할까. 혹시나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전화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 교장실에 전화했다. 교장 선생님은 본인이 인터뷰를 다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여 주셨다. ‘해당 문장만 보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의미는 저 한 문장으로 폄하되지 않을 만큼 교육적이다. 해당 수업을 한 교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셨다고 한다. 다행히 뉴스에는 방영되지 않았다. 며칠 뒤 부장 회의에서 교장 선생님은 내 상황을 설명하시며 ‘좋은 교육을 하고자 노력하다 보면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선생님들은 절대 위축되지 마시고 하고 싶은 교육을 마음껏 펼치시라.’라고 말씀하셨단다. 감사하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한동안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이 뒤이어 나왔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누군가의 존재와 의도가 내 삶을 흔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내가 쌓아 올린 삶과 수업을 녹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육 철학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과 삶의 방향은 명확하다. 경험하지 못한 삶, 경험하지 않을 삶을 경험하게 하는 것. 숨겨지고 가려진 자리에도 누군가의 생이 자라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그 과정이 조금은 거칠고 성길 수는 있다. 여러 굴곡과 부딪칠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난 경험으로 상처받았겠지만, 지치지 말라고. 앞으로도 좋은 수업을, 좋은 삶을 마음껏 꿈꾸고 보여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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