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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Apr 19. 2023

가벼운 손끝으로 쓰는 글

  책 한 권 쓰겠다고 모아둔 글을 열어 훑어본다, 무겁게 가라앉은 제목들이 눈에 띈다. 이 제목은 너무 부정적이네, 바꿔야지 혼잣말하며 주섬주섬 손질한다. 바꾼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민이 많을 땐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 법. 자판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진한 어둠으로 채색된 글이 가득하다. 읽어달라고 내놓은 글을 불편하다고 덮으면 어쩌나. 흔하디흔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해 보이면 어쩌지. 걱정이 손끝까지 와닿아 무겁다. 자판 위에 다시 손을 얹기가 두려워진다.


   쓰는 삶은 읽는 버릇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돌이켜 보니 읽는 내용이 다 어둡다.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오롯이 담아낸 글을 좋아한다. 거친 분노를 거름망으로 담담하게 정제한 표현에 밑줄을 친다. 생각난 김에 이북을 열어 보니 그런 책들로 가득하다. 미등록 이주 아동, 촉법소년, 현장 실습 청소년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탈학교 청소년, 학교 폭력 피해자 이야기를 담아낸 책들이 책장에서 가지런하게 빛난다.


  그늘져 흩어진 삶을 누군가가 조심조심 걷어 올려 정돈한 것이겠지. 주류와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를 향한 기록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되돌아보니 내 삶이 그랬구나 싶다. 중심은커녕 평균에도 올라서지 못해 힘겨운 나날이 많았다. 내게 학창 시절은 결핍과 부재로 기록된 시간이었다. 남자다움, 단체 생활, 권위와 위계라는 규율이 버거웠다. 늘 그런 규율에 모자란 학생이었기에. 남자답지 않았고, 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권위에 순응하지 않았다.


   학교의 과도한 체벌 문화를 지적하며 학교 홈페이지에 항의성 글을 올린 다음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어느 순간 내 글은 삭제되고, 홈페이지는 실명제로 바뀌었다. ‘다른 애들은 다 괜찮다는데 넌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불평이고 불만이야?’라는 말이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원래와 당연히의 세계에서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어느덧 난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시절 내가 즐겨 읽던 책은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였다.


  한동안 다움과 다름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위태롭게 살았다. 대학교에 가서도 축구와 농구를 하지 않는 나를, MT와 농활, 과 생활에 참여하지 않는 나를 선배들은 아싸라고 불렀다.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며 영화평을 끄적거리던 시절. 혼자 밥을 먹는 게 부끄러워 식당에 들어서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웃음이 난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던 과거의 내가 안쓰럽기만 하다.


  어느 날 영상과 영미문화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 시간에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감상했다. 그 영화엔 광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를 하기 위해 애쓰는 남자 주인공 빌리와 그를 응원하는 윌킨슨 선생님이 나온다. 다움과 다름에서 다름을 택한 빌리가 덤덤하게 고향 마을을 떠나는 장면을 보며 많이도 울었다. 빌리의 세계엔 그를 응원해 주는 어른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나의 세계엔 그런 어른이 없었을까.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고, 조금 예민해도 괜찮다며. 그런 의문을 품고 살았다.


  어느덧 십수 년이 흘러 12년 차 교사가 됐다. 얼핏 보면 학교는 평화롭다. 예전과 같던 체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고통으로 힘겨운 삶들은 여전하다. 학교를 벗어나는 아이들이 늘어가지만, 어른들은 학교 밖 삶의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학교 안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울과 불안으로 자해를 하거나, 남성성과 여성성의 틀에 갇혀 자신을 비정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일찌감치 노동 현장에 나간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서로를 ~충, ~장애라는 말로 혐오하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학교 복도는 늘 시끄럽다. 다들 화기애애하게 어울려 놀기 바쁘다. 그 틈으로 어둡게 채색된 표정들이 눈에 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용히 옮기는 걸음에 눈길이 간다. 점심을 거른 채 교실에 엎드려 잠자는 모습에 걸음을 멈춘다. 웃음으로 가득한 운동장 뒤편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 글이 머무는 시선은 그런 아이들이다. 그래서 어떤 글은 미처 놓치고 살피지 못한 삶을 향한 사죄의 편지가 되었고, 어떤 글은 더 예민하고 불편해지기 위해 다짐하는 일기가 되었다.


  애써 밝게 채색하려던 제목을 내버려 두기로 한다. 그러자 무겁던 손끝이 가벼워진다. 마음을 바꿔 이 어둠을 더욱 짙게 칠하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의 세계에 든든한 어른으로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의 슬픔을 다정하게 위로하기 위해 이 어둠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되뇌어 본다.


  가벼운 손끝을 다시 한번 자판에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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