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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May 09. 2023

보이지 않는 선물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다.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긴 채 어색한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선다. 불도 켜지 않은 교실에 몇몇 아이들이 엎드려 자고 있다. 군데군데 빈자리도 눈에 띈다. 5월 아침의 냉기가 감도는 교실. 옆 반 아이들이 부르는 스승의 노래가 복도를 지나 우리 반 문 틈새를 밀고 들어 온다. 민망한 적막이 채운 교실에 작게 울려 퍼지는 스승의 노래라니. 두 달 남짓한 시간이지만 좋은 선생 노릇 하겠다며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선생은 아니었던 걸까. 얼굴에 부끄러움과 실망감 그사이의 감정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축하는 아니더라도, 지각은 하지 말아야지, 아니 교실 불은 켜 두어야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못난 마음을 들키기 싫어 일부러 쿨한 척 교실 불을 켠다. 큰 소리로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오지 않은 아이에게 연락한다. 자리 주변 쓰레기를 줍고 책상 줄도 맞추라며 이런저런 군소리도 곁들인다. 평소에 잔소리를 많이 해서 그런 걸까. 듣기 싫은 소리를 반복해서 나조차 싫어진 걸까. 다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 얘기인데. 흔히 말하는 인기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존감에 생채기를 내는 의문이 계속해서 솟구쳐 오른다. 일부러 대답을 외면한 채 교실 밖으로 나간다.


  하필이면 이런 날 우리 반 수업이라니.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지만, 내상이 심각하다. 그래도 ‘교사는 학생들 앞에서 늘 최고의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은사님의 말을 되새기며 교실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의 적막함과는 달리 교실에 생기가 넘쳐흐른다. 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책을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아 있는 아이들. 그 어느 때보다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태연하게 물어본다. “다들 왜 이렇게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잖아요.”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다른 아이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스승의 날인데 수업 열심히 들어야죠.”, “맞아요, 선생님 아이들이 수업 열심히 듣는 거 좋아하시잖아요.”라는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말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난다.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그거였지. 교사로서 살아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수업으로 아이들을 잘 만나고 있을 때였지. 그 마음을 알아준 아이들이 고맙고, 이벤트 하나 해주지 않았다고 뾰로통하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청소 시간이 되자마자 교실에 올라가 본다. 한 아이도 빠지지 않고 책걸상을 교실 뒤로 밀고 자기가 맡은 구역을 꼼꼼하게 청소한다. 매번 내가 말해야 열던 창문도 환하게 열려 있다. 5월의 산뜻한 바람이 교실 안을 가득 채운다. 웃고 떠들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움직임에서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전달되는 마음을 본다. 누군가의 존재를 신경 쓰며,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쓰는 진심이 선물이었구나. 지금처럼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무탈하게 지내자는 말을 속으로 읊조려 본다.


  보여지는 마음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다는 이유만으로 받던 학생들의 관심과 애정이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그 마음을 얻으려 시기와 질투,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날들도 있었다. 스승의 날 이벤트도 그런 거겠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전시하듯 걸려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아직도 드러나는 마음에 신경 쓰는 내가 밉고, 그런 것에 초연한 아이들을 보며 또 한 번 배우게 된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교실 밖으로 나간다. 텅 빈 교실엔 아침과 같은 고요한 적막함이 가득하다. 기울어가는 햇살이 책상에 따스하게 앉는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공간엔 늘 온기가 있다. 내일 아침에도 교실 불은 꺼져 있겠지. 그래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늘 잠이 부족해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보이지 않는 선물을 두 손 가득 들고 교실 문밖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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