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적글적샘 Jul 10. 2023

아무 말 없던 학생의 한 마디 “자퇴할래요”

  얼굴이 창백한 아이가 내뱉은 말에 냉기가 감돈다. 자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는 순간 내 몸도 얼어붙는다. “자퇴라니 무슨 말이야, 학생이 학교를 다녀야지. 무슨 일 있어?” 


  아이의 설명은 간단명료하다. 몇 개월 동안 옆 반 학생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 괴로움을 참기 어렵다는 것. 긴 질문에 짧은 대답의 파편만 돌아온다. 깊숙이 파묻힌 마음을 캐내지 못한 채, 우선 집으로 아이를 돌려보낸다. 보호자에게 연락하기 전에 상황 파악부터 해야 했다. 급하게 반장, 부반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다. 아이들은 말 차례를 주고받으며 신나게 상황을 재잘거린다. 알고 보니 덩치가 큰 옆 반 아이가 우리 반 아이를 무릎에 강제로 앉히고, 볼을 꼬집고, 몸을 쓰다듬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게 아닌가. 과도한 물리적 폭력은 아닐지라도 아이가 경험했을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 일을 왜 몇 개월 동안이나 말하지 않았냐는 내 말에 반장의 말이 간단명료하다. “별일 아니니까요.”


  나는 말 그대로 신규, 초짜 교사였다. 학급 경영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내게 학급은 경영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노는 놀이터였다. 친구처럼 친근한 교사임을 자랑스레 여기던 시절.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스스로를 좋은 교사라 자부했다. 그런데 그 화기애애함 속에 가려진 그늘을 미처 보지 못했다. 내 무관심 곁에서 조용히, 하나씩 학교생활을 정리하는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상황을 파악했으니 수습해야 했다.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일도 필수다. 하필이면 아이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같은 교사끼리의 불편한 대화가 예상됐다. 26살 신규 교사의 일 처리가 얼마나 미덥지 않게 보일까. 두려움과 초조함을 구석에 밀어둔 채 목청을 가다듬는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한다. 어머니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으신 뒤 학생과 이야기해 보겠다 하신다. 나의 실수와 부족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더하지 않으셨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먼저 끊어진 전화를 향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호자의 끈질긴 설득에도 아이의 결심은 완고했다.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해야 한다는 나의 설득도 실패했다. 사실 그 설득엔 처음으로 맡은 반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강박감도 한몫했다. 학생의 탈락과 포기가 내 결점으로 읽히는 게 두려웠다. 결국 보호자가 자퇴 서류에 서명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하필이면 그날은 시험 기간이라 모든 선생님이 퇴근한 뒤였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점심을 굶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3시간가량 지났을까. 무표정한 얼굴의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자퇴 서류에 서명했다. 교무실 문밖으로 어머니를 배웅하던 즈음, 갑자기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를 내뱉는다. “선생님, 조금만 더 살펴봐 주시지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어머님.”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였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무거운 발걸음이 서서히 멀어질 무렵, 교무실에 멍하니 앉아 내가 살피지 못한 것들을 생각해 본다. 내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슬픔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좋은 교사라는 자부심도 모래성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책걸상을 치우니 빈자리가 휑했다. 학생 수가 적은 학교인 터라 20명 남짓한 교실에서 한 명의 존재감이 컸다.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엔 질문만이 남아 나를 괴롭혔다. 학생은 학교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꿈처럼 부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학교 밖으로 튕겨 나간 아이가 있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선생의 자격과 자질을 따져 묻는 불쾌한 물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습관처럼 떠난 아이의 삶을 캐물었다. 다행히 잘살고 있다는 소식이 틈틈이 전해졌다. 학교는 떠났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는 제자리였다. 그 아이의 추억은 다른 공간에서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잘 지낸다는 이야기가 나를 향한 위로처럼 들렸다. 그 아이가 무사하다는 안부 한줌으로 내 죄책감을 서서히 덮어갔다. 사실은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나간 게 아니었다고, 그냥 학교라는 공간이 너무 힘들었을 거라고, 그 아이는 자신만의 살길을 찾아갔을 거라며 애써 나를 다독였다.


  해마다 학교를 떠나는 아이가 늘어난다. 보호자들은 자퇴라는 선택지 앞에서 매번 절망하고 좌절한다. 애써 다른 선택지를 찾아 헤매다가 학교와 교사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 마음을 달래는 일도 우리의 몫임을 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떠날 아이는 언젠가 떠난다. 나는 교문 밖을 나서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학교 밖 삶의 길을 알려줬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학교 밖은 위험하다고, 그러니 안전한 곳에서 머무르라고 윽박지르듯 호소했을 뿐이다. 누군가의 선택을 의심하고, 결정을 미루라고 설득하면서 괜한 상처만 더한 것은 아니었을까.


  침묵을 듣고 어둠을 보는 일에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할지 모른다. 지금에서야 누군가의 슬픔을 발견하기 위해 부지런히 슬픔을 공부하는 이유다. 그러다 발견한 슬픔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고 다짐해 본다. 너의 슬픔을 존중하며 듣겠다고, 슬픔의 끝에 내린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떠나보낸 아이를 향한 뒤늦은 사과의 편지를 이제야 쓴다. 

작가의 이전글 이정임 작가의 글쓰기 수업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