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총평: 각자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인도 단체여행에서 마주친다. 그들의 사연, 내면, 신,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들은 무슨 사연으로 인도로 떠났으며, 인도에서 어떤 경험을 할까. - 작가가 인간을, 인생을, 신을 대면하고 서술하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소베, 미쓰코, 누마다, 기구치. 그리고 오쓰. 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소베는 아내를 병으로 잃은 중년의 남자다. 아내는 숨을 거두기 전 이렇게 말한다.
"나 ······ 반드시 ······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 ······ 날 찾아요 ······ 약속해요, 약속해요."
이소베는 환생을 전혀 믿지 않지만 아내의 유언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다 일본인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인도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누마다는 폐병으로 수술을 받던 중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준,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것만 같은 구관조를 잊지 못한다. 그 구관조를 기리는 마음으로, 인도의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방문하기 위해 인도로 향한다.
기구치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얀마에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 전우가 가져다준 고기를 먹고 구사일생한 경험이 있다. 그 고기는 다른 병사의 시체였다. 전우는 귀국 후 자신이 먹은 병사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전우는 그 기억을 끌어안고 술로 잊어보려 하다 피를 토하고 죽는다. 기구치는 그 전우와,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미쓰코는 대학 시절 가톨릭 신자인 오쓰를 유혹해서 종교를 저 버리도록 만든 후에 버린 경험이 있다. 그녀는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에 갔을 때 수도원에 있는 오쓰를 다시 만난다. 미쓰코는 그런 오쓰가 ‘쓸모없는 환영을 위해 인생을 허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그녀는 오쓰가 인도에서 수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인도로 떠난다.
오쓰는 대학 시절 미쓰코에게서 버림받은 후 그 아픔을 딛고 신학생이 된다.
“당신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 사람의 고뇌를 ······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와 자기 내면의 신에 대한 관념 사이에서 차이를 느낀다. 신부가 되지만 교회에서 떠나 인도의 갠지스 강, 바라나시에서 수행한다.
이들은 (오쓰를 제외하고) 인도 단체 패키지여행에서 마주쳐 같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각자의 사정을 끌어안고, 갠지스 강을 만난다. 모든 내용을 말할 수는 없으니, 이소베와 미쓰코에 대해 부분적으로 발췌했다.
복수나 증오는 정치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 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기분이 늘 남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그는 사근사근하게 누구와도 잘 지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저마다 마음 깊숙이 자신만의 에고이즘이 있고, 그 에고이즘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니 옳은 방향이니 주장하는 것을 실생활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정하고서, 풍파 일지 않는 인생을 꾸려왔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그는 또다시 강을 향해 불렀다.
“어디로 갔어?”
강은 그의 외침을 받아내고 그대로 묵묵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 은빛 침묵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은 오늘까지 수많은 인생의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것을 다음 세상으로 실어 갔듯이, 강변의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의 인생의 목소리도 실어 갔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하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 풍으로 바꿔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있습니다.
이소베에게는 아내가, 미쓰코에게는 오쓰가, 누마다에게는 구관조가, 기구치에게는 가스통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의 내면에게는 타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내면이 있다. 그런 인간의 깊은 내면, 선악, 대립, 삶과 죽음. 강은 이 모든 것들을 보듬고 묵묵히 흘러간다.
이 책은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의 마지막 소설, 병과 싸우며 쓴 소설인 만큼 개인적인 사실들이 인물들에 많이 드러난다. 작가도 누마다처럼 폐병으로 몇 번씩 수술을 하고 겨우 살아났으며, 오쓰처럼 어머니에게서 종교적 영향을 받았고, 미스코처럼 프랑스 문학에 대해 배우고 <테레즈 데케이루>에 심취했다. 그는 평생 동안 기독교, 자신 내면의 종교와 신에 대해 고민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이 책이다. 엄격한 교리를 기반으로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말하자면 아버지와 같은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듬고 묵묵히 안아주는 모성적인 신을 묘사한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초월적인 무언가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작가가 인간과 인생을 대하는 대면하는 태도,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가치가 이 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