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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Nov 07. 2022

자유죽음 - 죽음이라는 그 한계까지도 자유롭게

장 아메리

총평: 죽음보다는 자유에 방점을. 죽음이라는 그 한계까지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 그런 태도를 가져야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죽음에 대한, 저자의 고뇌가 묻어나는 책, 저자의 인생을 알면 더 다가오는 책이다.


  ‘자유죽음’이란 무엇일까. 자유롭게 죽는다, 죽음을 선택한다. 흔히 ‘자살’이라 불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책은 자살에 대한 책이다. 보통 ‘자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회에서 외면받거나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 즉 사실상 타살에 가까운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자살‘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그룹의, 어떤 상태의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즉, 자살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이야기를 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자살을 바라본다.

  이런 점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자살이라고 명명하지도 않는다. ‘자유죽음.’ 독일어 원제는 <Hand an sich Legen Diskurs über den Freitod>로, <자유죽음에 대한 담론> 정도로 해석이 되는 듯하다. 여기서 Freitod가 <자유죽음>이다. 그가 이런 단어를 쓰는 까닭은, 자살을 단순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판단하지 말고,  실제 자살을 선택하는 개인의 심리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자살 상황’이라는 쉽게 풀기 힘든 모순을 따라가 보고 그게 어떤 것인지 증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언어의 힘이 닿는 한.
저항할 무기를 갖추지 못해 무방비로 사회의 요구를 따라야만 하는 개인을 자살로 내모는 것이 사회라는 지적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심리학이든 사회학이든 모든 자살 연구가 사회라는 이름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기존 사회질서를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는 연구들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자살자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를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를 외면하고 사회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개인의 고유한 내면, 좀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내면에서 우리는 자살자와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죽음은 끝이다. 모든 것의 끝.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한다. 도대체 왜?

자유죽음에는 분명 호소의 성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호소보다는 메시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메시지는 호소를 넘어서는, 호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든 또는 공허한 개념의 장난으로 말해진 것이든, 일체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파랗게 질리게 만들 정도로 과도한 것일지라도 어떤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이 결행되었음을 말하는 게 메시지다. 자유죽음의 경우, 그것은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순간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늙은 후 연명치료를 받다가 병원에서 사망하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죽거나,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우리는 최대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죽음이 찾아오고, 발버둥 치다가 죽고 만다. 현대의학은 점점 더 발전해, 심장박동이 멈춘 사람도 외부적인 힘으로 심장을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다. 숨을 못 쉬는 사람에게 호스를 꽂아 산소를 집어넣을 수 있다. 죽을 것 같은 고통도 강한 마약들로 억누를 수 있다. 살아나도록 만드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수많은 기술들이 있다. 그런 죽음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스콧 니어링(1883~1983)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100세가 되던 해, 음식을 먹는 것을 중단한다. 진통제와 마취제를 포함한 일체의 의학적 조치들도 모두 거부한 채, 자신이 죽는 시기와 방법, 환경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렇게 자신의 자유에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 이러한 죽음이 바로 장 아메리가 말하고 있는 자유죽음의 궁극적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후의 모든 행위들은 나 자신이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 한계까지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유죽음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개인으로서의 나는 이러저러한 때에 사회가 내세우는 요구를 거절할 뜻을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회의 당위성만 요구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의 답은 꼭 찾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중략)…
자신의 자유의지로 택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일 따름이다. 물론 여기에 사회와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결국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이를 두고 사회가 할 말은 없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저자에 대해 이 책에 대해 그리 좋지 못한 인상만 남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실이 힘들어도 버티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성실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죽음에 대한 미화처럼 느껴지리라.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이후에 하나의 변명을 덧붙이려 한다. 작가인 장 아메리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썼을까.

 저자인 장 아메리는 1912년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에 들어올 때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몇 년 후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여한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잡혀 고문당하고, 수용소에 수년간 갇혀있었다. 그 후로는 20여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할 때에는 나치 독일 하에서의 경험을 전혀 쓰지 않다가, 1964년이 되고 그 경험들에 대해 여러 책들을 저술했다. 1966년에 <마음의 극한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사색과 그 현실>이라는 책과 1976년에 이 책 <자유죽음>을 저술했다. 그리고 1978년에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했다. 그렇다. 그는 <자유죽음>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2년 후 그것을 선택했다. 따라서 이 책은 자살이라는 하나의 일반 행위에 대한 그의 해석임과 동시에, 자신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앞서 ‘게슈타포에 잡혀 고문당하고, 수용소에 수년간 갇혀있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저자가 겪은 몇 년의 시간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 경험에 대해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실제 그 고문 기구들과 수용소를 보고, 고문 방식을 알게 된다 한들 그 경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그렇게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런 후 20년간 그 경험에 대해 일절 쓰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러다가 친구의 강한 설득으로 인해 나치 시대의 경험에 대해 저술한다. 그 활동 자체도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한 그가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을 때, 우리는 그를 나약하다고, 죽음을 미화한다고, 자살을 예찬한다고 비판할 수 있는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의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동정하고 때로는 나약하다고 수군거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내적 고민들과 요인들이 있다. 장 아메리가 그랬던 것처럼. 리뷰에는 담지 못했지만, 그 치열하고 묵직한 생각과 고뇌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일삼는 동정과 비난은, 그의 인생을 내 기준대로 멋대로 재단하는 무례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을 사회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하나의 군체로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것도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사람을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보아야 한다, 라는 것이 장 아메리가 결국에 말하고 싶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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