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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May 27. 2021

기사단장 죽이기 - 사회적 책임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장편소설이다. 최근이라고 해도, 2017년에 나왔으니 3년이 지났다.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던 기억은 있다. 그때는 여느 하루키의 장편소설처럼, 그냥 읽으면 도대체 무슨 책인지, 어떤 주제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알지 못하고 그냥 읽었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은 대부분 읽었지만,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내 안에 뚜렷한 주제를 남기지 않고, 그저 재미있었다는 느낌, 잘 읽힌다는 느낌, 그리고 어렴풋하게 남는 무언가의 이미지 정도만 남았다. 그러다가 독서 모임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루게 되어서, 다시 읽었다. 그런데 원래는 2월에 하려고 했던 모임이었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뤄져서 이제야 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 대해 해석을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고. 그러나 뭐라고 할까, 그러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하)

이 문장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표현해준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읽었다. 그래도, 가끔은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문장으로 나타내고 싶었다. 이전에도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여러 번 실패하고 뚜렷한 문장으로 남기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맞는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그것이 그리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단은 명확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모임 전날 밤에 있다. 그 전날에 오후 10시에 잠이 들어버려서, 새벽 1시에 잠이 깨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를 아래에 제출한다.

이 그래프에 의하면, 1시에 깨어나 3시쯤이 되어서야 다시 잠에 든 것이다. 그 2시간 동안, 누워서 <기사단장 죽이기>가 도대체 어떤 책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책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시간 동안 누워서 생각해본 것이다.

먼저, <기사단장 죽이기>의 줄거리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보자.
1. 초상화 화가인 주인공은 아내와 별거하고 일본 전역을 떠돌다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산 위의 집에 살게 된다.
2. 그 집의 원래 주인인 유명 화가의 미공개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를 천장 위 공간에서 발견한다.
3. 교육센터에서 초상화를 가르쳐주며 산다. ‘아키가와 마리에’라는 소녀를 만난다.
4. 이웃의 부자인 ‘멘시키 와타루’의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5. 새벽에 울리는 방울소리를 듣고, 사당 뒤 돌무덤 아래의 우물을 발견한다.
6. ‘기사단장’이 나타난다. 자신을 이데아라고 소개한다.
7. 마리에가 위기에 처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고 ‘긴 얼굴’의 도움을 받아 지하의 공간으로 간다.
8. ‘얼굴 없는 남자’에게 펭귄 열쇠고리 (마리에의 소유물)을 주고, 강을 건너, 마리에를 구한다.
9. 아내와 다시 만나고, 딸인 ‘무로’도 생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책의 이름이면서, 작중에 나오는 그림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품을 해석하려면 그 그림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 그림은 다음의 두 사건이 ‘아마다 도모히코’에게 일어난 후에, 그가 일본으로 돌아와 그린 것이다.
1. 그의 동생이 2차 세계대전에 징병되어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후, 자살한다.
2. 그가 독일에서 만난 연인이 나치에 의해 죽는다.
이 사건들 후에, 그림을 그렸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어떤 청년이 자기 아버지 뻘의 나이인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없다. 그림에 대한 작품 내 설명에 대해 들어보자.

이 그림은 뭔가 호소하고 있어요. 좁은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현실에서는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림 속에서 형태를 바꾸어, 즉 위장해서 실현했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나야 했던 사건으로.

그렇다면 그 기사단장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와 일제, 즉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찔러 죽이는 것으로, 죽게 된 동생, 연인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제도의 붕괴에 대한 바람을 보여준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주인공 또한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게 된다.

나를 죽이고 아키가와 마리에를 되찾는 걸세.

주인공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키가와 마리에를 되찾기 위해서 기사단장을 찔러 죽인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전 세대로,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의 학생이자, 자신과 비슷한 존재인 ‘멘시키’의 딸이라 생각되는, 다음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마리에’를 되찾는다. 그저 찔러 죽이는 것만으로 마리에를 되찾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긴 얼굴’을 협박해가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가, 깊고 좁은 통로를 지나, 뱃사공에게 삯을 지불하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돈나 안나의 안내를 받아서, 이중 메타포의 방해 또한 물리치고, 폐쇄 공포증 또한 극복해나가며 겨우겨우 마리에를 되찾는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가? 자신의 딸도 아닌데.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죄가 아니라고 해도, ‘기사단장’이라는 존재를 찔러 죽이고 고난을 겪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세대의 결과인 제국주의(기사단장)에 의한 결과를 자신이 짊어지고(찔러 죽이고) 고난을 겪게 되는 것(지하세계의 통과)으로 이후의 세대(마리에)를 되찾는 것이야 말로, 지금의 세대인 자신이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전의 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속죄하고, 보상하고, 이후의 세대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이 바로 우리 세대가 할 일이다,라고.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아닐까

이제는 하나하나의 소재에 대해 생각해보자. ‘얼굴 없는 남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프롤로그에 나오는 ‘얼굴 없는 남자’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인물이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지만, 그리지 못한다. 책의 결말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더 나은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인, 완벽한 사상, 활동,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하는 바로 그것. 주인공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아직은 ‘얼굴 없는 자’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좋은 화가는 아니지만, 그릴 수 있도록 실력을 갈고닦는 것이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책 초반부에 나오고, 계속해서 나온다. 멘시키의 초상화를 색다른 방법으로 그리던 중에 갑자기 생각나서 그리게 된다. 명확한 악을 상징하는 무언가. 나는 그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가  ‘시스템’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막는 사회의 시스템.

당신 안에서, 당신이 하는 올바른 생각을 붙들어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것, 그렇게 몸집을 불려 나가는 것. 그것이 이중 메타포입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쭉 당신 안의 깊은 어둠에 살고 있었어요.”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다, 나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 존재는 주인공이 지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막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이전 세대의 과오를 짊어지는 것을 막는 존재.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교육 시스템,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시스템. 비단 일본만의 일만은 아니라, 모든 나라에 이러한 문제는 존재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처럼. 주인공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하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타고 만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과 함께.

‘멘시키’는 어떠한 사람일까? 멘시키는 자신이 T.S.앨리엇의 시에 나오는 ‘빈 부분을 지푸라기로 채운 인간’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

그래도 나는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중략)... 나에게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황량한 황야에 버려진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순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고 지하세계에서 고난을 겪고 나오게 되는 장소는 ‘구덩이’이다. 그 방울이 있던 구덩이. 그 구덩이는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이 갇히게 되는 장소다. 주인공은 멘시키의 도움을 받아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은 혼자서 나오지 못한다. 구덩이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울을 울려 도와줄 사람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연대’를 믿는 것이다. 비록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행위가 어려울 지라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고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멘시키는 타인과의 연대를 믿지 못한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이다. 이전에, 멘시키도 또한 구덩이에 들어갈 때가 있다. 안에 들어가 조용히 생각을 해보고 싶다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주인공에게 몇 시간 후에 꺼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주인공이 그때 물어본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거기에 갇힌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멘시키는 그 상황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스스로 나올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그가 수십일 동안 감옥 독방에 갇혔던 때처럼. 멘시키는 ‘개츠비’의 오마주이면서 하루키의 예전 장편소설들, 특히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을 보는 것 같다. 우물 속에 들어가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혼자 악을 때려잡았던 그가 생각난다. 이제 멘시키를 탈피해 타인과의 연대를 믿는 주인공을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의 변화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제국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예술적인 관점에서라면? '기사단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전의 예술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을 찔러 죽이는 행위는 이전 예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얼굴 없는 자의 초상화'는 자신이 예술에서 생각하는 이상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도 해석이 될 것이다. 위에 서술한 것은 그러한 관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글에서 쓰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긴 얼굴', '무로', '동생-고미치', '이중 메타포'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관, 여성관과 연애관, 하루키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소재(차, 색, 오페라, 요리, 위스키, 칵테일,...), 그리고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많다. 지금 다 적기에는 너무 길고, 이들에 대해서 적게 될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소식하고, 아직 70세니까 더 많은 장편소설들이 나올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온 지 3년이 지났다. 하루키는 성실하니까 슬슬 다음 장편 소설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얼마나 재미있는 소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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