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음.
취업을 하고, 몸도 마음도 어느 하나 챙길 여유가 없어질 타이밍에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귀신같은 놈.
어떻게 알고 연락했는지 계곡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자고 한다.
계곡을 다녀온 게 언제였더라.
문득 생각에 잠겨봤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오자는 생각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가평의 한 계곡으로 향하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있는 나와 앞자리에 앉아있는 두 명의 친구를 포함한 3명의 우리.
20대 초반의 당돌함과 무모함을 방패 삼아 숙취를 토해내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는 패기를 내세우던 친구들의 대화는 어느새 온통 적금과 주식, 회사생활 이야기뿐이다.
못 본 사이 쌓아온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잠시뿐, 어떤 은행의 적금이 금리가 좋고 주식은 분산투자를 해야 하며, 주 종목은 어떤 게 좋다는 이야기가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가장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현금박치기로 구매한 차는 시원한 에어컨의 냉기와 바람소리를 배경으로 삭막한 이야기를 연료 삼아 굴러간다.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뒷자리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짐들,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나는 직장생활을 먼저 시작한 친구들의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자동차의 원심력과 함께 아무 힘없이 나뒹군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과 갈색 빛깔, 창문을 내리자 코로 들어오는 흙과 물의 냄새가 가져다주는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삭막해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물들인다.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계곡 근처 주차장은 일찍 출발했다고 자신하던 우리를 비웃듯 셀 수 없을 만큼의 자동차로 가득 차있다.
돌고 돌아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빈 공간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고, 성인남성 3명의 굶주림을 감당할 먹거리로 가득 찬 아이스박스와 여러 짐들을 간신히 잡은 평상 한 곳에 올려놓는다. 계곡으로 내려가려다 문득 누군가 짐을 훔쳐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나를 보고 옆에 있던 친구는 여긴 한국이야라고 외치며 계곡으로 앞장선다.
뒤따라 내려가 발을 담근 계곡물의 개운함은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나조차도 풍덩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육중한 몸뚱이를 던져 온몸 구석구석 계곡물의 냉기와 개운함을 전달한다.
그렇게 놀고먹고를 두어 번 반복하고 간만의 낮잠으로 하루를 채워가다 어느덧 다가온 복귀시간.
헤어짐의 종착지로 향하는 차 안은 올 때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모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온갖 잡념과 사회생활의 흔적(?)들은 계곡물에 다 씻겨서 흘러가버리기라도 한 듯,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몇 시간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달라진 친구들의 대화주제를 배경음악 삼아 눈을 감는다.
때로는 제목 없는 대화의 소중함을 잊는다.
목적을 바라보는 대화와 목표로 향하는 행동들의 익숙함에 사로잡혀 일상을 흘려보낸다.
그러다 한 번씩 깨닫는다.
제목없는 일상에 대한 간절함을, 제목없는 웃음에 대한 그리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