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메리카노

by 구구

중학생 때 웃긴 일이 있었다.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했다. 라떼는, 커피포트로 커피를 끓이던 시절이었다. 부엌에 떡하니 포트가 있는 걸 보고 요청한 것이다. ‘커피포트’란 것을 2023년 현 시점에 검색해 보니 주전자가 나오는 관계로 상세한 설명을 해야겠다. 높이 약 30cm의 머신과 그 머신에 옆으로 끼울 수 있는 유리 주전자가 우리집이 사용했던 기계다.


여튼 우리집에서 커피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야 자주 나기야 했지만 그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10대가 커피를 마신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나는 커피는 내릴 줄 모른다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커피를 탈 줄 모르냐고, 저기 저렇게 떡하니 커피머신이 있는데!’라고 성을 냈다.


평소 화를 잘 안 내는데 자기가 애착하는 것에는 화를 내는 아이다. 전에 X-JAPAN 얘기를 하다가 한 멤버의 생일인가 기일 얘기로(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포인트)로 엄청 삐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차근차근 나는 정말 커피에 대해서 아예 모른다고 설명하니 다행히 ‘진짜 기계 사용법을 모를 수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싸운 적 없이 아직까지 잘 지낸다.)


학생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이렇게 쓴 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병원이 그렇다. 들어가면 고통밖에 없는 이 공간을 왜 이렇게나 좋아하게 됐을까.


이번 입원 외에도 약 10년 전부터 2박 3일 정도의 입원을 두 번 정도 한 적이 있다. 첫 입원에서 치뤘던 수술도 복강경. 엄청 아팠다. 내 마음대로 마취제 버튼을 누를 수 있었는데 수시로 눌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만약 며칠이고 소변줄까지 달고 침대에만 붙어있어야 했던 병환을 가졌더라면 병원이란 ‘고통과 나’같은 단촐하고 집중적인 기억으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이번까지 세 번의 입원에서 모두 수술 후에는 걸어 다녀야 한다고 지시를 받았다.


종합병원은 하나의 거대한 마을이다. 이왕 걸어다닐 거 단조로운, 몇십 미터 안 되는 병동만 돌아다닐 게 아니라 구석구석 탐방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큰 병원을 다 구경해야겠다고 샅샅이 훑고 다녔다. 자극이 없으면 못 사는 성격이라 이런 저런 자극을 집어넣어 숨 쉬는 시간을 재미로 채워야 했다. 각종 음식점, 카페, 층 마다 다른 휴게공간, 식상하기 짝이 없는 병원 정문 앞 정원, 이곳저곳 전시된 그림들까지... 주상복합건물에 새로 이사한 사람이 된 것처럼 온갖 곳을 다녔다. 그래서 병원이 아메리가 된 것이다. 쓰디 쓴데 맛있다. 아픈 와중에 재밌다.


담배와 술을 처음 접했을 때 긍정적 경험으로 남았다면 후에도 계속 할 확률이 높다는데 병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도 좋았고 지금 세 번 째, 무려 암으로 입원했는데도 이번도 재밌었다. 일단 카페놀이를 할 수 있다. 카페인을 먹으면 누가 생각해도 몸에 안 좋으니 마시진 않았다. (나갈 무렵 반 잔 정도 마심) 근데 뭘 하냐고? 음... 매대에 있는 음식들을 구경한다. 각 카페마다 파는 음식과 병음료, 디저트류를 섭렵한다. 그리고 이건 몸이 좋아질 때 먹어야지 하고 계획을 짜 둔다. 포스기 앞에서 잘못 얼쩡거리면 직원에게 “계산하시겠어요?”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씩 웃으며 “아니요”하고 구경을 얼렁 마무리한다.


모닝 야쿠르트 사러가는 것도 일종의 즐거운 쇼핑이 된다. 수술 전 외래를 다니면서부터 야쿠르트 아줌마가 어디에서 장사를 하는지 봐 뒀다. 병동부터 몇 개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곳까지 가는 것은 훌륭한 운동이 된다. 10분도 더 걸린다. 운동하고 쇼핑하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야쿠르트차의 뚜껑을 열면 편의점 못지않은 구색의 음료들이 즐비하다. 수술 후에는 배변이 운동만큼이나 중요했기에 그걸 해결하려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하루 야채권장량을 다 채워준다는 의심쩍은 채소 음료, 요거트, ‘프로바이오틱스 10억!’이라고 써진 것들을 마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추억의 제일 싼 야쿠르트 말고도 좀 더 덩치를 키운 야쿠르트, ‘윌’같은 식으로 나온 음료 등이 프로바이오틱스 함유 음료군이다. 근데 제품에 써진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가격 차이가 난다고 프로바이오틱스 수가 10억에서 더 늘고 그런게 없었다. 그 후부터는 유산균 음료는 뚱뚱이 야쿠르트만 사서 먹었다.


편의점 구경도 빼놓을 순 없다. 빨리 낫고 싶어서 몸에 안 좋은 일은 최대한 하지 말자는 무의식의 발현으로 군것질을 많이 하진 않았다. 여기 와서 사 먹은 과자가 무려 한 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다. 대신 과자들을 보면서 먹는 상상을 많이 했다. 보름달빵은 그냥 안 땡기는 빵 맛, 꼬북칩은 양념 너무 발린 자극적인 맛. 에이스는, 기름지고 핵 맛있지.


나랑 관계없는 걸 보며 망상에 잠기기도 했다. 성인용기저귀... 하루에 몇 개나 쓰나? 무슨 수술을 받으면 필요하려나. 계절도 안 맞는데 군고구마는 왜 파는 거야? 똥 잘 싸라고? 섬유질? 아니 방울토마토 7알 담아놓고 4천 원? 스위스야? 여기는 종이컵을 수십 개 단위로 안 팔고 이런 단위로 파는군. 오...술을 팔지 않는다! 보호자들끼리 환자 재워놓고 술판을 벌일까 봐? 아.. 나 못 먹는데 잘 됐군. 여기는 신성한 공간이니 솔직히 알콜은 너무하긴 하다.


빨래방 구경 가는 것도 재밌었다고 말을 해야 하나? 이쯤되면 너무하다고 할 것 같다. ‘넌 뭐 다 재밌냐?’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가 봐’ 내가 할 일도 아닌데도 직접 가서 빨래방 세탁기, 건조기 비용이 얼만지, 동전교환기가 있는지도 다 체크를 했다. 세탁조가 얼마나 크나 궁금해서 세탁기 뚜껑을 열었는데 어떤 사용자가 미처 건지지 못한 양말 한 짝을 남겨둔 것도 재미포인트였다. 양말따위로도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무니까. ‘이것이 만약 팬티였다면, 초라한 팬티였다면?, 새 팬티였다면?! 아아아 새 팬티면 절대 안 돼! 팬티는 가끔 사잖아, 정말 소중하단 말이야!’ 병원서 논 게 너무 많았어서 쓰다가 날 새겠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점심시간... 역시 나는 글쟁이하기 딱 좋은 천상 거짓말쟁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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