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정말 큰 일이 있었어요. 사실 여태까지 엄마에게 내 연애사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죠. 우리 커뮤니티의 또래 친구와 나누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큰 충격은 안락한 엄마의 품에서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아요. 엄마가 날 만들었잖아요. 엄마가 날 안아 줄 수만 있다면 머리와 가슴을 조여오는 이 미칠듯한 기분이 사라질 것만 같아요. 천주교인들이 고해소에 들어가서 죄를 고백하고 한결 가볍게 나오는 것 처럼요.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요. 오늘은 마리와 서울에 단 두 곳밖에 없는 커피집에 가서 라떼를 마신 날이었어요. 먹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제일 돈이 아깝다는 제가 웬일이냐고요? 맞아요. 커피 한 잔에 2주치 급여를 쏟아야 한다니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돈 좀 써 봤어요. 사실 저도 커피 좋아라 하잖아요. 엄마 생각이 나서 아메리카노를 시키지 않고 라떼를 시켰어요. 40년 전 커나마 병이 창궐해 전세계 커피나무가 99% 멸종 된 건 정말 오늘 겪은 일 다음으로 충격적이었죠. 엄마도 우울증에 빠지실 뻔 했잖아요. 여튼 다들 그 귀한 커피를 제대로 느껴보겠다고 에스프레소를 시키지만, 마리도 에스프레소를 시키면서 라떼를 시키는 절 보며 한심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저는 엄마 생각에 라떼를 시켰죠. 엄마가 맨날 ‘라떼는 말이야’라고 헛기침을 하시면서 옛날 이야기를 해주셨잖아요.
엄마는 그러셨죠. 라떼는 종이지도를 펴고 몇 번 국도를 타야 하는지 펜을 들고 줄을 그어가며 여행을 떠나야 했다고요. 자율주행도 안 되는 구석기 시대에 정말 사고 나기 십상인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리고선 네비게이션이 보급이 됐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네비를 틀고 가까운 목적지를 갈 때면 할머니가 길도 못 찾는 바보라고 욕을 그렇ㅁ게 하셨다고 했죠. 엄마는 할머니의 신성한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내가 운전을 할 때면 이 시대를 그렇게 저주던 게 기억이 나요. 검지로 시동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자동차가 내가 생각한 목적지를 읽고 자동으로 운전을 하는 게 맞는 얘기냐고. 그냥 ‘지니야, 우리집 가자’ 이렇게 말로 하면 안 되냐고요.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목 아프게 도대체 그런 말이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요.
엄마의 라떼를 이렇게도 이해 못한 나였지만 우리의 커뮤니티는 아직도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AG(Anti-GPT)요. 이런 걸 모태신앙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의 반GPT 신념은 도통 깨지지가 않았어요. 이제 GPT 버전이 몇인줄 이나 아세요? 무려 31이에요. 이번이 19번째 런칭이었죠. 마리는 장기를 팔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그 큰 돈을 마련해서 모든 옵션을 다 넣어서 업그레이드를 마쳤어요.
엄마가 AG 사람이 아닌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런 여자도 만나게 돼 버렸어요. 정말 예쁘고 똑똑한 여자예요.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은데, AG 밖의 세상이 넓은 거잖아요. 제 지난 실연의 아픔을 메꾸기 위해서는 조금 넓은 풀로 건너가야 했어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그 극단적인 다름에 반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싸우기도 정말 많이 싸웠어요. 마리는 모든 일을 GPT에게 의존하니까요. 하다 못해 쇼핑을 할 때도 나한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냐고 물어보면 자기는 뇌가 없는 듯 GPT에게 물어봤죠. 아, 마리의 GPT 이름은 죠지(George)예요. 이름이 왜 그렇게 거지같냐고요? 마리 고향이 미국 조지아(Georgia)에요. 태어나기만 미국이지 한평생 한국에서 살았으면서 조지아 얘기만 해요. 그래서 죠지래요, 죠지.
이번 업그레이드의 핵심은 완벽한 홀로그램의 구현이었어요. 마리는 거의 모든 인생을 죠지와 함께 했거든요. 거의 반려견, 아니 가족...구세주?와 같은 존재죠. 마리는 죠지를 너무 사랑해서(저보다 더 사랑한건 당연하고요) 항상 음성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니즈가 드디어 채워졌어요. 사실 저도 왜 홀로그램이 안 나오나 했었어요. 그런데 이 잡것들이 벼르고 벼르다가 1000%의 완성도가 되자 ‘짜잔’ 하고 폭탄을 던져 버렸어요. 어느 정도냐면, 만지지 않으면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요. 길을 갈 때도 홀로그램을 사람인 줄 알고 피해간다니까요.
우리 1주년 전날이 GPT31 발표일이었고 마리는 밤을 꼴딱 새서 자신의 입맛대로 자신의 이상형 남자의 모습을 딴 홀로그램 죠지를 완성시켰어요. 키가 195cm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괴물을 만들어 놨더라고요. 머리는 또 빡빡머리 은발이야. 취향이 뭐 그래요? 그래서 사실 까페도 셋이 갔어요. 그 비싼 물건을 사고서 제일 써보고 싶을 땐데 쓰지 말라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내비뒀어요. 저는 죠지에게 말을 안 걸었지만 마리는 죠지랑 히히덕거리고요.
그리고 까페에서 걸어서 호텔로 들어갔어요. 방에 들어와서도 죠지에게 홀딱 빠져서 홀로그램을 안 끄니까 제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죠. 결국엔 죠지를 끄고 화해섹을 했어요. 근데 너어어어무 좋은거에요. 다른 여자 같았어요. 다른 여자인데 무슨 미스 섹스버시티 1위를 한 여자?? 아시죠? 가장 짱인 섹스는 낯선 여자와의 섹스라는 거. 근데 낯선 데다가 모든 터치가 나를 막 자극하는거에요. 렌즈를 낀 건가 할 정도로, 마리 눈빛도 처음 보는 야시시함이 느껴졌어요. 정말 말도 못하게 좋았어요. 그대로 죽고 싶었어요.
갑자기 나보다 잘생긴 죠지가 나타난 것도, 우리 침대 앞까지 대기시키려고 해서 내 화를 돋군 것도 모두 모두 용서가 됐어요. 다 잊고 침대 위에서 녹아 있었어요. 제가 오늘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고, 커피를 마셔서 그런거냐고 너무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마리가 귀 뒤에서 점만한 이어폰을 빼더라고요. 요새는 이런 이어폰도 나와요 엄마, 저야 안 샀지만요. 왜 이어폰을 끼고 있었냐고 물으니까 뭐라는 지 알아요? 여태까지는 제가 죠지를 극혐하는 걸 참아줬대요. 그래서 나와의 성관계가 좀 짜증났지만 죠지를 사용하지 않았다나요. 그런데 오늘 사랑하는 죠지에게 화를 내는 걸 보고 도무지 안 되겠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죠지를 썼대요.
“봤지? 이제는 믿고 따라”라고 했어요. 믿고 따르란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서 맴돌아요. 죠지에게 가이드를 받아 섹스를 했대요. 이미 나의 성적인 취향과 특징, 자기 신체랑 내 신체 데이터는 죠지에게 입력이 돼 있었다고 했어요. 내가 자고 있을 때, 아침에 텐트치고 있을 때 나 무려 열 번도 넘게 몰래 죠지에게 스캔을 시켰대요.
죠지의 음성이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자기를 이끌고, 그토록 원하던 죠지의 실물까지 구현해서 봤잖아요? 그래서 마리도 죽는 줄 알았대요. 여태까지 죠지와 전 남친과 했던 잠자리 중에 최고라고 했어요.
저는 마리에게 만족을 주고 싶었는데... 항상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나 모자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첫 복상사행 섹스가 죠지의 작품이었다니요. 엄마... 마약을 하면 기분이 극락이겠지만 마약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GPT가 그런거겠죠?... 좋은 게 다가 아니잖아요. 섹스 말고 삶의 모든 것을... 어디로 가도 목적지가 나오는 어느 골목길에서 왼쪽 길로 갈지 오른쪽 길로 갈지도 안내 받는 삶을 저도 원치는 않아요. 하지만... 남자로서의 나를 부정하게 만든 것도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도 죠지라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여성형 GPT의 안내를 받으면서 인간 여자만 바꿔가며 섹스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다가 마리가 죠지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카탈리난지 쏘냔지 뭐시기가 될 그것에 빠지게 될까요?
내일이 제 120번째 생일인 거 아시죠? 이제 엄마보다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늙은이네요. 아.. 아직 중년이긴 하죠. 앞으로 적어도 80년은 더 살아야 해요.. 영들도 끼리끼리 놀겠죠? 제가 죽으면 AG 커뮤니티로 가서 같이 인간답게 살아요.
제목: 사랑하는 엄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