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올라오니 모두가 인스타를 하고 있었다. 오늘내일 폐교가 거론되는 학교, 남근석에 마을 이름이 새겨진 원시나 다름없는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랐다. 부엉이가 부엉부엉하고 쓰레기 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깜깜한 밤에 삼촌이 쓰던 구한말 유물급 책상에서 꾸역꾸역 공부를 했다. 농어촌특별전형으로 인서울을 하고 나니 대한민국 시민 누구나 평등하게 누렸다고 생각했던 보급형 미디어론 알 수 없는 미디어 세계가 펼쳐졌다.
손에 흙도 안 묻혀본 것들... 거의 다 수도권, 광역시급에서 자란 친구들에게 시골에서 왔다고 하니 “아, 우리 부모님 주말 농장해서 어제 상추 따고 왔어.” 소리나 하고 있다. 우리 집은 소를 키운다. 매일같이 소똥을 긁어냈다. 아, 돼지가 아닌 게 다행이다. 소똥은 그나마 구수하니까. 요지는... 이들에게 노동이란 매일같이 주어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인스타 피드로 구인공고를 보고, dm으로 알바 문의를 하고. 과연 서울은 세계적으로 꼽힐만한 대도시라 그런지 다양한 루트로 다양한 공고가 났다. 그런데 유독 나랑 노는 우리 과 애들은 인스타에 나올 법한 핫한 곳에서 일하는 걸 좋아했다. 나도 친구들을 따라 감각 터지는 까페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사진 찍으라고 이따시만한 전신 거울을 두 개나 갖다 놓은 곳이다. 다들 예쁘게 입고 와서 셀카 찍고 친구 찍어주기 바쁘다. 힘들지만 좋다. 여기 있으면 나도 얘네처럼 멋지게 사는 것 같으니까.
“서연아, 너는 팔로워가 왜 이렇게 많아?”
나를 이 까페에 인도해준 같은 과 친구에게 물었다.
“나는 인스타 한 지 4년차야 진희야....”
서연이가 커피를 빨다 말고 립을 다시 덧칠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오래 하면 너처럼 많아져?”
“진희야, 너는 우리 까페 앰배서더야? 털보사장 여친이야? 여기 말고서는 왜 사진을 안 찍어?”
“그거야... 시간이 없잖아. 공부하고, 일하고. 수요일 밤에 잠깐 짬날 때 우리 학교 수영장 가서 수영할 때 말고는 내 시간이 하나도 없어.”
“아니... 나처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진을 찍던가... 옷을 졸라 잘 입어서 패션 계정으로 키우던가...아님 벗던가.”
“뭘 벗어?”
“좀 야하게 나가 보라고.”
“나 야하게 꾸밀 옷도 없어.”
“너 수영복은 있지?”
“있으니까 수영장을 가지.”
“그럼 너는 수영복으로 나가자.”
‘수요일에 만나는 수영복 요정’. 금세 불어난 팔로워들이 붙여준 내 별명이었다. ‘수수요’라고들 불렀다. 댓글 보는 재미에 수요일엔 항상 늦게 잤다. 수요일만큼은 피곤함이 싹 가셨다.
‘아름다워요’. ‘수영복 여신’, ‘항상 응원합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좋은 말만 해주길 시작했다. 나 또한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인친들이 있어서 이게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았다. 고마웠다. 일주일치 내 모든 노동의 수고는 인스타로 보상 받는다고 생각했다.
까만 수영복 한 벌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총천연색 수영복이 옷장에 몇 장 들어왔다. 협찬으로 받았다. 비키니 협찬 문의도 많이 들어왔지만 입을 엄두가 안 났다. 학교 수영장에서 누가 비키니를 입냐고. 그리고 뭔가 비키니는 넘으면 안 될 선을 넘는 일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팔로워 수는 항상 선을 넘지 않았다. 매일 늘어서 고맙긴 한데 그 속도가 서연이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10년은 걸리겠다. 그만치면 인스타도 망할 세월 아닌가.
늘어나는 수영복, 팔로워와 함께 구린 제안도 많이 들어왔다. 이름만 걸린 빈 계정에서는 성을 팔라는 암시의 글이 매주 들어왔다. 개인의 제안은 그나마 귀엽다. 소소하게는 스타킹 사진을 받고 싶다, 대범하게는 월 몇 백 벌 생각 없냐는. 근데 기업형 계정의 제안은 뜨악스러웠다. 월 수입 얼마 보장, 차 제공, 신변 보장, 이런 걸 조직적으로 연결하는 암흑가의 어깨들을 내가 어떻게 만날 수가 있나. 나는 비키니도 못 입는 쫄보인데...이런 건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니고 담뱃불은 혀로 끄는 언냐들이 하는 거 아냐?
늦은 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장학금 같은 거 탔냐고, 내게 돈 좀 있냐는 소리를 했다.
“엄마, 나는 생활비 다 내 돈으로 하는데 돈이 어딨어...”
“아버지가 경운기에서 떨어지셔서 크게 다치셨다. 병원비 마련하려는데 소값도 너무 떨어졌어...”
“아, 난 몰라. 그래서 내가 진작 다 처분하고 품삯받는 일이나 하고 살라 했잖아. 시골 살면 굶어 죽는 일은 없는데 왜 일을 사서 만들어...”
두루마리 휴지를 내 침대 한 구석으로 집어던졌다가 다시 돌돌 말았다. 간만에 속상한 수요일. 인친들을 위한 사진도 올리지 못할 만큼.
거짓말처럼 다음 날은 내가 다쳤다. 까페에서 아아 배달 주문 15건을 뽑는 템핑을 하다가 ‘악’소리를 내면서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간 손목이 아프다 아프다 했는데 사단이 났다. 책 한 권만 들어도 통증이 느껴졌다. 하필 일하는 총 두 곳의 알바 자리가 모두 까페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고향에 가면 엄마보고 하라던 하루살이 일을 하면서 보기 싫은 아빠 병간호를 해야 한다. 여기에선 손을 안 쓰는 알바를 찾아야 한다. 과외? 학생을 어렵사리 구하면 내 티칭능력이 별론지 다들 빨리 그만 둔다. 학교에서? 새 학기 시작해서 너무 늦었는데...
서연이, 지연이, 소연이. 우리 과의 연이 삼총사가 이태원에 새로 오픈한 클럽을 간다며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남긴 불금의 밤. 세 년들이 스와로브스키 파츠가 빛나는 손톱을 보이며 뽀글이 잔을 들 때 나는 곰팡이 핀 학교 기숙사에 혼자 남아 꺼이꺼이 울었다. 왜 나만 이런 건지. 나는 4인실 월 20만 원 기숙사에 살아서 월세가 센 건 아니니까, 극빈칭이라고 하긴 뭐하니까 이런 삶에도 고마워해야 하는지.
인스타를 켰다. 이번 주 수요일에 피드를 안 올렸다고 댓글과 dm으로 안부를 묻는 이가 많았다. 몇 달 동안 뜸했던 그렇고 그런 제안도 한 건 왔다.
reborn-안녕하세요, 혹시 명품에 관심 있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원하시는 거 먼저 사 드리고 사진을 받고 싶어서요. 아 너무 노출 있는 걸로 오해 마시고요...
오... 신박하기로는 너가 1등, 음... 나는 신박한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꼬라지. 이게 다 자기검열 때문이다. 진작 비키니 사진 올리고 그래서 막 팔로워 쭉쭉 올라가고 광고도 받고 했으면 생활비 걱정을 했겠어? 남들은 즐겁게 마시는 커피 때문에 손모가지 날라갔겠냐고. 다 나 때문이야. 아직도 멘탈은 소 키우는 우마을에 갇혀 유교걸로 살아서...
-노출이 어느 정도면 될까요?
-맨날 원피스 수영복만 입으시잖아요. 비키니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좀 확실하게 말하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아서요. 사진 몇 장에 무슨 명품을 받는다는 건가요?
-보통 수요일에 사진 올리실 때 3-4장 올리시죠? 한 컨셉으로요. 그러니까 비키니 한 컨셉,(아 제가 골라서 진희님께 비키니 종류 미리 괜찮냐고 물어보고 보내드릴게요.) 세 장이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장소가, 제가 찍는 수영장에선 그게 정말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탈의실이건 집이건 상관 안 할게요.
-그럼 제가 먼저 명품 받고, 그 다음에 사진 보내고. 이렇게 가면 될까요?
-그렇죠!^^*
-명품이 종류가 많은데 뭘 받을 수 있나요?
-지갑 어떠세요?
-됐어요. 죄송합니다.
-그럼 백은요?
-무슨 백이요?
-뷔통...?
나 명품 모르는데... 침착하자. 돈 아끼는 애다. 서연이한테 물어보자. 서연이에게 dm을 쳤다.
-서연아, 급해 급해.
어찌나 인스타만 하고 사는지 빛보다 빠른 답장이 왔다.
-뭐야?
-루이비통 적당히 싸고 인기 많은 모델이 뭐야?
-알마bb가 흔하지.
어떻게 이름이 알마냐 알마(alma는 이탈리아어로 영혼이라는 뜻). 내 새로운 영혼이야? ‘알마 메롱 메롱’? 영혼 맛탱아리 갔어? 가격을 확인하고서는 다시 reborn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 모델은 어때요?
루이비통 공홈의 링크를 보냈다.
알마BB ₩2,250,000
-그래요. 처음에는 이걸로 가죠.
-그런데 제가 물건을 어떻게 받아요?
-만나서 드리면 되죠.
-제 얼굴을 아시긴 하지만 좀 부담되네요.
-아쉽다...근데 이해해요. 그럼 택배 보내드릴게요.
-택배는 더 부담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역시 그냥 안 하는 걸로...
-잠깐만요! 생각 좀...
reborn이 생각 중이시다. 30분 동안 말이 없다. 되팔이 하면 얼마 나올까... 200만 원? 내 200만 원 날아가나? 기숙사비 20, 식비 20, 통신비 5, 생필품 5... 병원비와 신학기 책값이 없다 치면 무려 숨만 쉬고 사는 네 달치 생활비다. 아, 이거 파는 게 더 힘들겠다. 그냥 돈으로 달라 하자.
-제가 지하철 사물함에 넣을게요.
다행히 reborn이 말을 걸었다.
-나중에 찾아가면 되겠네요.
-XX역 4번 출구 쪽에 물품보관함이 있어요. 찾아보니까 5일 이상 보관하면 짐이 옮겨진대요. 제가 보관함 넘버랑 비밀번호 보내고 5일 내에만 찾아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근데 그냥 백 가격만큼 돈을 넣어 주심 안 될까요? 보고 싶어요. 우리 수수요~ 오진희님 인스타 처음 시작한 날부터 우연히 보고서는 쭉 지켜봤어요. 저만한 팬도 없을 거예요...
다른 아이돌 팬들은 조건없이 그냥 선물만 조공하던데... 사진은 뭔데. 자, 돌다리도 두드리자. 두드려, 두드려. 아아아. 돈, 돈, 돈.....두드리긴 개뿔. 바로 답을 보냈다.
-그래요, 물건 기다릴게요. 맞다. 비키니... 우리 물건이랑 비키니랑 같이 봐야겠어요. 물건 받아 놓고선 비키니 못 입겠음 곤욕일 듯.
-비키니는 이미 사놨어요.
평범하다. 배꼽을 덮는 팬티에 적당히 크게 가슴을 덮는 브라... 검정을 좋아하나. 이건 바프보다도 건전하네.
-걱정과는 달리 평범하네요.
-제가 노출 심한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백이랑 비키니랑 내일 넣을게요.
-아...네...
다음 날 11시 반에 사물함 정보를 받았다. 백화점 오픈은 10시 반, 이게 말로만 듣던 오픈런인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달려갈 수 없었다. 5일이랬지... 언제가 가장 안전한 시간일까? 사람이 5일 동안 거기서 주구장창 서 있을 순 없을 거 아니야... 결국 닷새 뒤 오전 5시에 물건을 찾았다.
되팔이도 순조로웠다. 같은 날, 연이 삼총사가 자주 가는 단골 중고명품가게에 205만 원에 팔아줬다. 5만 원짜리 41장. 이렇게 큰 돈을 실물로 처음 만져본 날이었다.
일사천리로 병원에 갔다. 21만 6150원.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프롤로 주사 및 각종 괴상한 치료를 받고 나니 청구된 돈이었다. 다음부터는 엑스레이 비용 빠진다치면 대략적으로 20만 원으로 잡자. 일주일에 한 번씩 오랬으니까 한 달이면 81만 6150원. 생활비 50만 원을 빼고 나면 73만원 가량이 남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길거리에 패피가 많다. 나도 딱 한 번만 일상 사진을 올려보고 싶다. 나도 압구정에서 24시간 있는 듯한 서연이처럼, 호텔밥을 학식처럼 먹는 지연이마냥, 크롭티에 미쳐버린 소연이같이 뭔가 자연스런 하루를 공유하고 싶어.
우리 넷 단톡방에 말을 걸었다.
진희-나 쇼핑 좀 도와 줄 사람!!
서연-너 아빠한테 생선으로 백도 받았잖아. 용돈도 받았어?
소연-뭔가 이상하다 이상해.
지연-누구냐?
진희-뭐가 누구야?
지연-남친, 사업해? 나이 얼마나 많아? 설마 30대?
진희-너네 돈줄이 아빤건 괜찮고 내 돈줄이 아빠면 이상해?
서연-아니 너 쇼핑 원래 안 했잖아.
진희-소값이 올랐다.
소연-소연이 소값올라 쏘 햅피 :)
서연-무슨 옷 살 거야?
진희-타...탑나인?
서연-자라로 가자.
지연-코엑스 자라 5시, 진희 새 옷으로 풀착장하고 저녁은 기념으로 내가 산다.
자켓, 블라우스, 치마, 구두, 가방. 34만 5000원이 사라졌다. 서연이가 화장실로 끌고 가더니 메이크업포에버 스타일로 풀메도 시켜줬다. 나 오늘은 ‘수영장’ 빼고 그냥 여신인데?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마셨다. 지연이가 저녁값으로 쏜 돈이 39만 원. 다들 이렇게 사는 거구나. 30은 삼식이마냥 가벼운 돈이구나. 우리 4인방이 와인잔을 들고 테이블에 걸터 앉아 잇몸 만개 미소를 보이는 사진 피드 조회수가 바로 천을 훌쩍 넘었다. 친구 셋 팔로워가 나보다 높은 탓이 컸겠지만 다른 이유만 찾았다. 돈이 피드를 버는구나. 돈이 있어서 우정놀이도 하고, 사진도 찍고. 수영복 여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내친김에 아이들과 사진도 찍으러 갔다. 길바닥에 흔하게 널린 즉석사진관을 이제서야. 다같이 토끼 머리띠를 하고서는 진짜 사진도 나눠 가졌다. 지하철이 끊긴 시간이 됐다. 사람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놀면 어떻게 집에 가나 궁금했었다. 서연이는 노란 스포츠카를 타고 온 남친이 데려갔다. 지연이는 까만색 웃돈 택시를 불러서 오피스텔로, 소연이는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엄마가 은색 벤츠를 끌고 데리러 왔다. 나? 한 손에는 폰을, 다른 쪽에는 사진을 꼭 쥐고서는 혼자 30분을 걸어서 기숙사에 도착했다.
reborn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물’을 사물함에 넣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도 나도 dm을 서로 하지 않았다. 기념비적인 4인방 피드에 그는 댓글조차도 안 달았다. 정품 가방을 사주며 약속을 지켰고 나를 일주일씩이나 기다려줬다. 답례가 있어야지. 계약이니까. 이게 노동이지. 집에서 댓가 없는 노동만 하다가... 주고 받고를 이제야 하는구나.
자정이 넘었다.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우울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검은 비키니를 걸치고 아무도 없는 새벽의 샤워장에서 몸만 보이도록 대강 셀카를 찍었다. 누가 널 강제했니? 옷 사고 친구랑 놀고, 좀 웃어. 나 혼자 물때가 가득한 샤워장 거울을 보며 웃으려다가 고개를 떨궜다. reborn에게 사진 세 장을 보내고선 비키니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샤워기 물을 찬물로 틀고서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심연 속을 헤맸다. 기침을 콜록콜록 하다가 겨우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reborn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했다.
reborn-진희님, 너무 고마워요. 약속 지킬 줄 알았어요.
-네.
-다음에는 무슨 가방 받을래요?
-우리 또 하나요?
-싫어요? 저는 좋은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저는...우리 그때 돼서도 변하지 말고 친구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번만 해요. 이번엔 알마pm으로 부탁드려요.
비슷한 가격대에 무난한 디자인으로 링크를 보냈다. 이번엔 내가 직접 그 가게에 가서 팔아야겠다. 주인 언니가 지금처럼 가격 쳐주겠다고 언제든 다시 오라고 했으니까.
-너무 비슷비슷한 디자인 아니에요?
-평범한 게 좋아서요.
-그래요. 저도 비키니 사진 보낼게요.
색만 바뀐 비키니, 흰색이다.
-아 그리고...부탁이. 비키니나 팬티에 패드나 뭐 그런거 안 끼웠으면 해요.
-설마 비쳐요?
-뭐가요?
-그게요.
-그러니까 뭐가요?
-우리 거래 그만 할래요?
-저 너무 선물 드리고 싶어요... 싫어요><
-제가 휴지를 끼던 뭘 넣던 간에 상관하지 말아요.
-그건 좀 곤란해요. 비치진 않고 튀어나온 게 보일 거에요. 찌찌가. 천이 얇은데 색이 흰색이라 그 정도는 보일 것 같아요.
-노출 없다고 했잖아요.
-그게 노출이에요? 가렸는데...남자들은 웃통 벗고 운동 하고 뭐하고 다하는데 여자 찌찌에는 뭐 필로폰이라도 달렸어요?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세 번째 가방까지는 ‘마지막이에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열 번이나 가방을 받았고 10개월간 노동 없이 행복하게 공부를 했다. 그런데 회가 거듭할수록 renew가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reborn- 진희님
-네, 아직 때가 안 됐는데... 무슨 일이세요?
-가방 다 어디 있어요?
-그건 왜요?
-내가 진희님이 들고 다니는 모습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지난 대화창을 스크롤해 올려봤다. 진짜네...
-몰랐어요.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되요?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죠.
-너무 실망이에요.
-제가 사진 안 줬어요?
-제가 들고 다니는 거 보고 싶다고 말 하는 건 안 들었어요?
-저 진짜 어렵게 살아요. 다 갖다 팔았어요.
-다 판 거 알아요. A명품샵 2호점에 계속 갔잖아요. 언제까지 파나 보고 있었어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진희님, 가방 가격이 300인가요? 감시할 사람 5일 쓰는 건 100만 원이면 돼요. 저는 일하는 거 외에도 앉아서 숨만 쉬어도 하루에 100은 들어오는 사람인데...
아, 얘가 그 조직이나 다름없었나... 나는 이제 큰일났다. 경찰한테 말하면 부모님이 소환되나? 경찰한텐 뭐라고 말해? 내가 사진 판 애가 내 뒤를 밟았다고? 죄명이 뭐야? 하루동안 말을 못했다. 충격이 너무 컸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는 직원이 내가 산 삼각김밥 가격을 계속 말하다가, 다음엔 계산 좀 하라는 얘기를 몇 번 하더니 돌부처같이 멍 때리는 나를 치고 지나가 창고 정리를 하러 갔다.
내가 기숙사 몇호실까지 사는 것도 알까? 나를 얼마나 감시한 걸까. 내 방에 카메라를 설치했다면? 컨스피러시라는 영화에서 멜 깁슨이 분한 주인공, 제리 뺨치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한다는 음모론적 망상에 시달렸다. 나는 여기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휴학계를 내고 워킹홀리데이를 알아봤다.
그간 돈을 팡팡 쓰지 않은 덕에 워홀 비자 조건인 통장잔고 5000AUD를 맞출 수 있었다. 비자용 신체검사를 받느라 병원을 가고 은행도 들리고. 정말 필요한 외출 두어 번만 하며 기숙사에 칩거해 살았다. 한 달 뒤 인천공항에서 이 나라를 떠났다. 첫 출국이 도망인 셈이다.
Bernard’s Blueberries. 10년 전에 프랑스에서 이민을 왔다는 고용주의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했다. 밤마다 언덕 너머 Bernard의 집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기타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블루베리가 물릴 때 쯤 되자 수확 시즌이 끝났고, 농장 아시아 애들끼리 다같이 체리 농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한국에서는 최고로 비싼 과일을 매일같이 먹을 수 있는 혜택 말고도 이곳 생활 자체가 나름 재미있다. 다들 나처럼 돈 벌려온 사람들. 상황과 목적이 비슷한 애들끼리 어울리니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도 reborn의 눈이 닿을 수 없는 시골이라서 좋았다. 그렇게 싫었던 외딴 시골에서야 다시 웃을 수 있다니 내 팔자가 웃프다.
좋았다. 참 좋았다. 하지만 원래 불행한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0개월 간 백(bag)발로 좋았고 여기선 딱 반토막을 쳤다. 여기 온 첫날부터 무려 5개월간 험악한 호주 벌레를 피하기 위해 긴바지만 입고 살았다. 그런데 기숙사 세탁기가 고장나 딱 하루 반바지를 입고 나갔더니 벌레가 냉큼 달려들었다. 왼다리에 여섯 방, 오른쪽에 열 두 방. 뭐에 물렸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오래 일한 친구도 모르겠다고 했다. 상처에서 진물이 나고 병변이 딱딱해지는 것도 같다. 사진까지 팔 정도로 잘난 내 몸이 추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약국에서 바르는 항생제를 받아 발랐다. 약이 안 들면 먹는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먹는 걸 먹으니 그제서야 병이 나았다. 그간 추한 상처를 보며 밤마다 생각했다. 한국에서 시급노동자로 일하며 팔목이 나갔고 호주에서는 다리가 곰보가 될 뻔 했다. 내가 정직하게 일한다고 불행이 날 봐주며 비켜가지 않는다. 어떻게 사나 불행이 찾아오는데 왜 내 시간을 모두 바쳐가며 일해야 하나. 잠 잘 때 빼고 내 모든 시간을 갑에게 죄다 주며 사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인가. 좀 더러운 일을 하고 내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게 더 날 위한 선택이다.
주말이면 유흥에 쌈짓돈을 쏟아붓는 같은 숙소 남자애에게 한인업소 주소 몇 곳을 받았다. 한인 가라오케에 가서 술 시중을 들었다. 새로 태어나고 나니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어디 사람 묻어버리면 절대 못 찾는 나라에서 이러느니 치안 최고 한국에서 안전하게 술을 팔자.
호주 벌레의 독은 내 어린 날의 소심함을 모두 해독시켰다. reborn따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호주 술집에서 한 달 일하며 글로벌리하게 무서운 남자들을 좀 봤다고 정신적 맷집이 세진걸까. 한국에선 금,토요일에만 바에서 일하고선 백값만큼 수입을 올렸다. 덕분에 대학도 무사히 졸업했다. 2년을 풀타임으로 근무하고서는 대출을 좀 받아서 선릉역 근처 지하에 조그마한 바를 열었다. 말빨이 좋아 금세 단골이 많아졌고 나이도 계속 먹어갔다.
“나이 서른에 이 정도라. 대단하다 나.”
장식용 장미를 사각사각 자르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언니... 너무 부러워요.”
나도 모르게 하는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스무 살 직원이 아양을 떨었다.
“나는 네가 부러워.”
“뭐가요?”
“다 할 수 있는 나이잖아.”
“다 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지.”
“이거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어?”
“사장님 좋은 대학 나오셨죠? 저는 고졸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가 나빠서 뭐든 이해가 잘 안 돼요. 저 옷 좋아하거든요. 옷장사가 참 좋아보이는데... 남들은 돈 없어도 뭐 인터넷으로 가게도 차리고 다 잘하는데 저는 유튜브 계속 봐도, 강의를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음... 좀 그런 거 같더라.”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요즘 누가 거지같이 살려고 최저임금받고 일을 해요. 여기는 다른 데 비하면 완전 건전 바잖아요. 이런 데가 또 어딨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 네가 뭐가 머리가 나빠... 너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돈 잘 모으고 있지?”
“네, 알려 주신 대로 수입 80%는 다 저금이랑 투자하고 있어요.”
“빨리 자유를 사자.”
“네.”
“아자.”
“아잣! 아잣!”
아... 추임새도 깜찍해.
제일 아끼는 이 스무살 직원에게는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일주일 휴가를 줬다. 이번에도 답례 선물로 내 옷을 사오겠지. 걔네보다 코디를 잘 해. 연이들은 잘 있으려나. 얘는 연이같은 친구는 있나? 무심했네. 한창 놀 나이에 아끼고만 사는 게 꼭 정답은 아니다. 일장일단이 있으니까. 내가 능력이 되니까 열심히 사는 애한테 선물을 줘야지. 나는 왜 멘토가 하나도 없었을까.
“사장님 전화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계속 사장님과 통화를 직접 해야 한다고 하시네요.”
직원이 전화기를 건네줬다.
“안녕하세요, 오진희 대표님, 저희 사장님께서 내일 하루 전체 대관을 문의하셨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비용은 원하시는 액수만큼 드릴 겁니다.”
오진희... 오진희라...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커다란 보름달이 뜬 밤. 직원 애들은 미리 하루 쉬라고 일러뒀다. 우리 가게명, reborn이 새겨진 유리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린다. 개명 전 나의 본명을 아는 사람. 선물을 받은 지 딱 10년이 되는 날. 그 사람이다.
“반가워, 기다렸다.”
까만 비키니에 까만 가운을 걸치고 배시시 웃어줬다. 내 첫 선물이었다.
제목:백 [bæɡ],[bæ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