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기

짧은 소설

by 고내

우리 언제 만나

그래 얼굴 한 번 봐야지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지 모두?


형식적인 인사와 안부가 오가는 단체 채팅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지수는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 한 때 같이 근무했던 직장 동료들이었다. 비슷한 또래라 금방 친해졌고 모두 다 이직을 하여 각기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는 동안에도 만남을 이어가던 모임이었다. 모두를 힘들게 하던 직장 상사를 함께 뒷담화하며 친해졌는데 이제는 그 상사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지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곧 갈 예정인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챗gpt에 물어보았다.


[플라멩고 공연장은 어디가 좋을까?]


얼마 되지 않아 화면에는 세비야 지역의 유명하다는 플라멩고 공연장과 장단점과 가격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뜨기 시작했다. 예약 페이지 링크까지 알려줄까? 다정한 말투는 덤이었다. 지수는 마치 옆에서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아 노트북 페이지를 덮어버렸다. 카페 안은 한산했지만 답답한 느낌에 좀처럼 그 무엇에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올여름휴가를 앞두고 자궁에 작은 종양을 발견한 건 천운이었다. 작년 건강검진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담낭 제거 수술 이후 종종 진료를 받던 병원에서 자궁 검사를 권유했다. 전혀 상관도 없는 분야에서 뜬금없는 검사를 권유해 지수는 단번에 거절했다. 무엇보다 지수는 지금까지 성경험이 전혀 없기에 여성 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갑자기 왜요?

한 번도 검사받은 적 없으시죠?

그렇긴 한데. 여기는 간과 췌장 진료하는 곳 아닌가요?


간호사가 한쪽에 세워진 배너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궁암, 유방암 무료로 검사받으세요. (40세 이상)] 지수는 어쩌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간호사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뿌듯함과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지수는 결국 유방암은 됐으니 자궁암만 검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은 종양을 발견했다. 수술을 하니 마니 의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악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결국 수술을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자 지수는 직장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그만큼 긴 시간 회사에 안 나가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작은 회사라 통원 치료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수는 결국 5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회복도 금방 되었다. 아까운 건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과 숙소값, 그리고 사라진 직장이었다. 부모님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고향에 내려와 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지수는 상상만 해도 목에 올가미를 건 기분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지수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생활비를 조금만 보태 달라고 부탁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새 직장을 구하겠다고 약속을 하며 일단 벌어놓은 돈을 아껴 쓰겠다고도 했다.


집에서 엄마가 해 준 밥 먹으면서 있으면 좋은데.


지수는 그 말이 '집에서 내 감정 쓰레기 좀 받아주면 좋은데'라는 말로 들렸다. 무엇보다 고향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매일 엄마와 싸우는 동생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내려가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지수의 여동생은 서울에 있는 꽤 좋은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부나 외모나 모든 면에서 지수보다 나았던 동생은 단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다 얼마 전 갑자기 고향에 있는 공공기관으로 전출 신청을 한 동생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뜬금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알고 보니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와 연애를 꽤 오래 했고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만나다가 동생이 남자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부모님은 펄펄 뛰었다. 서른 후반인 동생과 동갑인 남자는 새벽 배송 아르바이트와 대리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홀어머니를 도와 조그만 가게를 운영 중이었다. 엄마는 말 그대로 드러누웠고 천륜을 끊니 어쩌니 시끌시끌했던 것이 바로 2년 전이다. 그때 동생과 엄마는 돌아가면서 지수에게 전화를 했다. 지수는 당시 직장 스트레스로 정신과를 다니던 시기였다. 지수는 약을 더 늘려야 했다. 현재 둘은 휴전 상태로 각자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일단 합의한 상태이다. 물론 여전히 엄마와 동생은 지수에게 전화를 해 자신의 상태를 하소연하곤 했으나 다행히 이전에 비해 빈도수는 많이 줄었다.


잠은 어떠세요?

새벽에 자꾸 깨서

수면 질이 안 좋으시다는 말씀이시죠?

울다가 깨는데요.

우울증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시네요.


늘 같은 질문, 같은 대답, 같은 약을 받아오며 지수는 어떻게든 내년엔 새 직장을 구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지수는 취업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노트북을 열어 지피티에게 알함브라 궁전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지원되는지 물으려는데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되는 사람? 나 엄마 올라오셔서 애기 맡기고 나갈 수 있을 듯

오 진짜? 그럼 금요일 저녁 어때?

난 그날 보고. 애가 요즘 계속 엄마만 찾아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일단 콜!


지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사실 이 모임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건 꽤 오래되었다. 비혼은 아니지만 결혼 생각이 여전히 없는 지수에게 남편 얘기, 시댁 얘기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다 모임원 중 두 명이 아이를 갖기로 다짐하면서 지수는 원치 않은 부부관계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지수는 연애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자세로 해야 아이가 잘 생기는지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료들을 당최 무슨 얼굴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긍정의 의미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카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지수는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잘 지냈어? 왜 이렇게 살 빠졌어!

나 육아 때문에 죽을 것 같아. 진심 엄마들 리스펙.


지수는 어깨에 맨 백팩을 둘 곳이 없어 우선 바닥에 내려놓았다. 인사를 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를 다니며 힘들었을 때 옆에서 힘이 돼주었던 사람들이다. 누가 뭐래도 소중한 동료들이다. 지수는 버스를 타고 카페까지 걸어오느라 상기된 얼굴을 식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수씨, 살 좀 쪘네? 쉬는 거 너무 부럽다.

맞아. 와 육아에는 퇴근이 없잖아. 나 지금 이 순간 지수씨가 제일 부러움.

새 직장 알아보고 있어? 요즘 정신없겠다.


지수는 당황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여행을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부럽다는 합창이 쏟아져 나왔다. 부모님을 잘 둬서 좋겠다는 말도 들었다. 지수는 커피를 들이키며 아이스로 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미혼인 동료가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고 육아 중인 두 명의 동료가 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수는 연신 귀엽다는 말만 반복했다.


맞다. 지수씨 여동생은 아직도 그 사람 만나?


지수는 손에 쥔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동생과 엄마 때문에 지수가 꽤 고생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언니로서 지수 역시 열심히 반대했고 그로 인해 동생과의 사이도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까지.


응. 그런 것 같아. 연락을 요즘 안 해봐서.

와 대박. 꽤 오래 만나지 않았나?

그러니까. 운명이네. 결혼하겠다.

이쯤 되면 부모님도 인정해 주셔야지. 안 그래?


지수는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들이 동생 얘기를 묻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들은 매번 만날 때마다 동생이 아직도 그 사람을 만나는지 여부를 물었다. 마치 그것만이 지수에게 궁금한 유일한 것인 것처럼. 그리고 늘 똑같이 반응했다. 지수는 부러 스페인 여행 계획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짰는지 과장하여 이야기했다.


세비야에서 플라멩고 공연을 보려고. 미리 예약을 안 하면 못 볼 정도로.

우리 아들 봐봐. 표정 정말 웃기지.


동료 한 명이 휴대전화를 들어 자신의 아들 영상을 재생시켰다. 나머지 두 명이 휴대전화에 붙어 귀엽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은 쌍둥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성토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잠을 한 시간도 못 잔다는 이야기와 나중에는 수면 중 수유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도 지수의 여행 계획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 보여? 여기 탈모 생긴 거?

손목에 파스도 못 붙여요. 냄새 때문에 애가 우니까.

나도 내 강아지를 자주 안다 보니까 나중에는 손목이 아프더라고. 난 그냥 파스 붙이고 살아. 어쩔 수 없어.


지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은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지수가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와 함께 나온 케이크의 모서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서로가 얼마나 불행한지 배틀을 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료들을 보며 지수는 입 안에서 맴도는 수많은 이야기를 언제 꺼낼까 고민했다.


나 사기당했어.


갑자기 여섯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지수를 향했다. 잠깐의 정적 후 지수는 쏟아지는 질문을 귀에 천천히 담았다. 언제? 무슨 사기? 누구한테? 돈을 날린 거야? 뭐야? 무슨 일인데?


책 내준다고 해서 한 달 동안 단편 소설 썼거든. 프로그램 신청비와 제본비까지 해서 30만 원 정도 입금했는데 회사가 파산했지 뭐야. 알고 보니 나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더라고. 단체로 소송하기로 했어. 얼마 전에는 경찰서에도 다녀왔어. 나 경찰서는 처음 가봤는데 별 거 없더라. 돈을 돌려받으려고 고소했다기보다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의미에서 고소했어. 큰 기대는 안 해.


동료 한 명이 지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음고생 좀 했겠다. 그래도 30만 원이라 다행이네. 큰돈은 아니라서.


지수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건 억지로 참았다.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지수의 얘기를 듣던 세명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그리고 내 동생 결혼해. 이번 겨울에. 그래서 나 여행 가는 거야. 동생 결혼식 안 가려고.


이번에는 정적이 조금 더 길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신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동생 그거 그냥 없는 셈 치려고. 사실 걔가 누굴 만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걔가 나한테 평생 외롭게 사는 주제에 사랑이 뭔지나 아냐고 말해서 그때부터 난 동생이랑 마음속으로 연을 끊었거든. 가족들은 내가 여행 가는 거 몰라. 나중에 스페인에 가서 연락하려고. 나 결혼식 안 간다. 이렇게. 재밌지?


말해놓고 지수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지수 어깨에 손을 올렸던 동료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떨리는 눈동자,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손. 지수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한 세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부스러기만 남은 조각케이크를 싹싹 긁어 입에 넣었다. 초콜릿 크림이 입 안을 감싸자 커피가 당겼다. 다 마셔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쉬운 듯 바라본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덕분에 행복해졌지? 그러니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지수는 백팩을 어깨에 들쳐 매고 카페를 나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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