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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치라서 다행이야: 전주 골목에서 만난 ‘책보 책방

방향감각은 잃어도, 책과 강아지는 얻었습니다

by 도보방랑가 김근희 Feb 18. 2025

아주 어릴 땐 작은 어촌 마을에 살았거든요, 그때는 몰랐었는데 도시로 이사 오고 나서 제가 길치였단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런 저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취미는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거 같아요. 걸어가다 길을 헤매도 '뭐 어때, 찍고 가다 보면 아는 길이 나오겠지.' 이렇게 말할 수 있거든요. 또 매번 가던 길이 매일 새롭기 때문에 항상 흥미를 갖고 주변을 살펴보게 되죠. 


지인들과 무작정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을 때 비자림이라는 숲을 방문했었어요. 그 방대한 숲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이 길은 아까 왔던 길인 거 같은데, 저 나무 아까도 본 나무 같은데!?' 그 길이 그 길 같고 발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지요.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 보면 가끔 해골이 덩그러니 놓여있잖아요. 그땐 그 장면을 별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그제야 그 장면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하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죠


아무튼, 건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수준의 길치이면서 앞장서서 걸어가길 좋아하니까 항상 친구들은 말하죠. 길치가 앞장을 서느냐고. 그런데 길치니까 앞장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길을 헤매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길도 걸어갈 수 있는 것. 걷는 걸 좋아하면서 심각한 길치라면 사진이라는 취미가 적성에 맞을 수도 있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카메라를 들고 아침부터 이곳 저것 기웃거리며 도보방랑을 했었어요. 새벽부터 4시간 정도를 열심히 걸었고 발바닥이 뜨끈뜨끈해질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지요. 친구에게 추천을 받은 카페를 찾으려고 구도심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가던 참에 독특한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바로 '책보 책방'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 나무로 만든 간판이었지요. 


그저 나무로 만들어진 간판에 '책보 책방'이라는 이름만 적혀있고 책방 같은 건물은 주변에 보이지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던 참에 깊은 골목 안에서 단서를 찾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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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도심의 주택 골목 안에 있는 입구조차도 일반적인 주택의 대문처럼 되어있는 책방은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찾기 힘든 위치에 있었어요.  상가들이 밀집된 지역도 아니었고 상가지역의 변두리이자 주거지역과 접해있는 장소인지라 헤매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이게 길치의 행운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았어요.


파란 대문을 넘어 안쪽은 오래된 주택가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있었어요. 여기저기 피어있는 작은 꽃들과 아기자기한 장식들, 적당히 따스한 햇살이 작은 마당을 밝혀주고 입구까지 디딤돌이 깔려있었죠.  그리고 유리로 된 창 너머로 선반마다 책들이 꽂혀있는 책방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 발을 끌어당기는 존재가 있었어요. 


브런치 글 이미지 4


마치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래의 조각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어요. 창가에 무심히 놓인 책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공간, 그리고 편안히 쉬고 있는 강아지. 어렴풋했던 나만의 쉼터가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어요. 이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꿈꿔왔던 삶의 한 장면 같았어요. 이전까지는 막연했던 ‘쉼의 공간’이 서서히 분명한 형태를 갖춰 가는 듯한 감동을 받았지요.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문이 굳게 닫힌 책방은 마치 세상과 분리된 듯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던 제 눈에는, 창문 너머에 보이던 강아지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잠에서 살짝 깨어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들어왔죠. 잠시 저를 힐끗 바라보던 강아지는 이내 다시 자기만의 쉬는 시간을 즐기더라고요. 이 모든 것들이 조금은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느껴질 무렵 제가 아닌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아직 영업 전인데.'

'아, 강아지가 너무 이뻐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어요. '

'아 그러시구나. 11시에 여는데 먼저 들어와서 봐도 됩니다. '


작은 삽을 들고 나타난 아저씨는 책방의 문을 열어주시고는 다시 화단을 가꾸기 시작했어요. 문은 열려있지만 먼저 궁금증을 해결해야만 했어요.


'이런 곳에 책방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너무 이쁘네요. '

'하하하, 제가 운영하는 건 아니고 제 아내가 운영하는데 곧 도착할 거예요. '

'아, 그렇군요! 좀 들어가서 구경 좀 하고 있을게요. 사진 찍어도 괜찮을까요? '

'그럼요 그럼요. 편안히 보시고 계세요.'


조심스레 들어선 ‘책보 책방’은 여느 서점이나 책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어요. 선반마다 놓인 책들 옆에는 대표님이 직접 한 자 한 자 써 붙인 포스트잇 메시지들이 가득했거든요. 책 한 권 한 권, 공간 구석구석마다 사장님의 손길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정성껏 골라 두신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모든 공간에 애정이 묻어있고 메시지가 달려있어서 홀로 구경을 하고 있어도 옆에서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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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여보세요. ', '자시 자신의 마음과 친구를 해볼까요.', '마음 따라서 여행을 해보세요.' 

책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메시지를 통해서 설명해주시고 하고, 또는 그 책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지요.  또 공감이 가거나 좋은 문장들을 책에서 적어서 기록해놓기도 했어요. 


저는 보통 책을 읽을 때 공감이 가거나 좋은 부분들은 한쪽 귀퉁이를 살짝 접어두거든요. 그 상태로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주는걸 참 좋아해요. 상대가 이 접어둔 부분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거든요. 옆에 있지 않아도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나중에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러한 과정이 '책보 책방' 전체에 있었어요. 모든 공간에서 대표님의 생각들을 발견하고 책보 책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을 알 수 있었어요. 


청소년들을 위한 독서 활동도 진행되고, 버려지는 책들로 펩아트를 해서 다시 가치를 부여하고.  단순한 책방을 넘어 여러 가지 가치 실현을 위한 고민과 노력들이 보였지요. 하나의 목적이 아닌 공간과 개념의 확장을 통해 더 많은 가치를 시도하려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보였어요. 


이제 이 공간이 다른 의미로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역시 뭐든 아는 만큼, 이해한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내적 친밀감이 충만해질 무렵 제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던 강아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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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도 없는 공간에 불쑥 들어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 제 모습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180이 넘는 남성이 영업시간 전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와 있으니 당황하실 수도 있을 텐데 자연스러운 일인 듯 대표님은 인사를 해주셨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상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서먹함을 깨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시나요? 


'강아지가 너무 이뻐서 홀린 듯이 들어왔어요. 사진 찍었는데 보여드릴게요!'

'너무 이쁘네요, 진짜. 어떻게 이렇게 나오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으신가요? 누군가의 마음을 허무는 데 있어서 사진은 참 좋은 도구이지요. 상대의 모습을 담거나 상대가 좋아하는 대상을 담아서 선물로 주세요. 금방 친해질 수 있답니다. 물론, 그 상대의 매력을 잘 포착해서 찍어야 하는 게 중요하지요!


'길 가다가 문득 간판을 보고 들어와 봤는데 너무 좋아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참 신기해요'

'일을 그만두고 뭘 할까 하다가,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글을 통해서 사람들하고 소통하고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

'그렇군요. 이 전주에 독립서점들이 몇 개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공간을 통해서 이런 활동들을 하는 곳이 있었다니. 정말 제 마음에 들어요 완전 취향저격이랄까요!'

'우리 말고도 몇 군데가 더 있는데 이 근처에도 있어요.'


대표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몇 군데의 책방이 모여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각자가 갖고 있는 특징과 개성을 살려서 지역사회와 함께 기여하고 소통하는 일들을 해보시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콘서트부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앞으로 지속할 것이라며 이렇게 같은 방향성을 갖고 움직여가는 서점들을 알려주셨지요. 이야기 도중에 방금 언급한 서점의 대표님 한분이 오셔서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조만간 방문을 꼭 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지요. 조만간 이 서점들을 탐방하며 이야기를 담아볼까 해요. 각자가 갖고 있는 특징과 스토리를 통해서 또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네요.


또한 이곳은 공간이 크게 구분이 되어있어요.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는 책들이 놓인 공간과 구입을 한 뒤에 볼 수 있는 책들이 놓여 있는 공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은 참 아늑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언제든지 이 공간에서 편하게 책을 읽어나 간단한 만남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를 하셨어요. 현재는 따로 예약을 하고 빌릴 수 있는 방식은 아니고 자리가 비었을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었어요.  열린 독서와 만남의 공간을 꿈꾸는 대표님의 생각이 드러나는 지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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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보방랑가로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도시문화 전반의 이야기도 하게 되었지요. 이 도보방랑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책보책방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어봤어요. 사람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싶다고 말이죠. 다행히도 좋아하시면서 허락을 해주시고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지요.




조만간 사진동호회도 운영을 할 예정이거든요. 저 혼자만의 작업을 벗어나 사진을 관심 있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단순히 사진 기술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배우는 모임이지요. 이 모임을 통해서 사진을 넘어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토론하거나, 전시회를 관람하며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하고, 사진 매거진을 구독해 좋은 내용을 공유하기도 하며 단순한 친목을 넘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모임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한 활동들을 이 브런치에 다시 공유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도보방랑가 프로젝트의 목표이기도 하니깐요. 


조심스레 이런 계획을 이야기하고, 가끔 '책보 책방'에 모여도 될지 물어봤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지요. 다음에 방문할 땐 이쁜 강아지 사진을 한 장 뽑아다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책보 책방'을 떠났어요. 자 이렇게 도보방랑가 프로젝트는 순항 중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그저 지나는 길목에 있었고 길을 헤매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할 곳에서 이런 장소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길목 길목마다 우리도 모르던 장소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서 피어나고 있다는 것. 저는 도보방랑을 하면서 이 피어나는 이야기들을 찍고 글로 적어 조금씩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보고자 해요. 그 시작과 앞으로의 여정을 응원해 주시면 정말 고마울 거 같아요. 글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독자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큰 힘이 되거든요. 도보방랑가 김근희, 오늘의 방랑기록을 마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참, 이름이 '책보 책방'인 이유는요! 책을 구입하면 책보자기에 책을 포장해서 주신다고 해요. 요렇게요! 

브런치 글 이미지 16



책보책방 인스타그램

월화 휴무. 오전 11시에 열고 저녁 7시 즈음에 닫아요.

 




* 이건 번외의 이야기. 


전주시는 요 몇 년간 도서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 왔어요. 각 도서관의 특색에 맞춰서 건물의 외적 디자인과 공간 디자인을 바꾸고 조성한 사업이지요.  반응은 나쁘지 않았어요.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호수 가운데 있는 도서관이라든지 또는 건지산 내에 있는 산속 도서관, 한옥마을 근처에 있는 여행자 도서관 등.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또는 여행자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을 잘 만들어 놓았거든요. 사진을 찍는 입장으로도 참 괜찮긴 하고요.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상식적이기도 한 행정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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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가꾸어놓은 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을 따라 흐르는 천변에 있는 버드나무를 다 벌목을 해버렸거든요. 시민들의 반대가 심해지니 나중에는 몰래 밤에 나머지 부분도 다 도둑처럼 잘라버리고, 시민들의 목소리는 무시하는 행정의 모습.  책을 근간으로 하는 도서관은 이쁘게 잘 조성하면서 그 근본이 되는 나무들은 가차 없이 벌목하는 모습이 참 모순적이기도 하지요. 오히려 그 예산을 이런 지역 기반의 작은 서점들에게 투자해서 문화적인 사업을 발전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유야(라고 말하고 핑계)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타협점을 모색하기는커녕 문제가 되는 나무를 벌목해 버리는 쉬운 방법을 택해버린 행정을 보면 아직도 갈길이 멀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보지요. 




다음 글 예고

수요일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시 도보방랑을 할 예정이에요. 문득 군산 바닷가가 보고 싶어 져서 군산에 들러 사람들의 모습을 도촬 할지 또는 전주에 있는 여러 도서관들의 모습을 담아낼지 아직 결정을 못했는데 이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로 찾아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둘 중에 더 끌리는 게 있으신가요? 댓글 달아주신다면 제 여정에 지침을 삼는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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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버드나무 대량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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