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투영하여 떠나는 시간여행
오래될수록 그 아름다움이 발하는 것들이 있다.
사람, 추억. 사람의 손길과 추억이 닿은 모든 물건들.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우리는 시간을 붙들어 매지 못하기에 그 순간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 틈에 책갈피처럼 끼워 놓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끔 추억을 꺼내놓고 그 지난 시간으로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나 역시 그러한 시간을 종종 갖는 편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어렵고 그 가운데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종종 무너지는 순간에, 그래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서 털어낼 용기조차 없어지는 그 막막함이 나를 허탈하게 만들 때 나는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투영하고 그 가운데 떠오른 모습이 조금은 나의 기대와 다를 때,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돌아올 때, 무심결에 보이는 그 잠깐의 이기심.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조금 생각해주지 못하고 내뱉은 그 말에 상처받았을 때.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 어쩌면 내가 아직 그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스스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사진기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조금은 이른 퇴근.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 눈 앞에 보이는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종점은 동물원. 엔틱 하기로 유명한 고색창연한 장소이다.
규모로는 3번째인가 한다 하던데 다른 지역의 동물원은 위쪽 지방의 사파리를 가본 것이 다라서 2번째 크다고 하는 곳은 도통 감이 안 온다. 다만 여기는 종종 어릴 때부터 혼자 와서 사념의 시간을 갖던 곳이라 좋다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벚꽃을 심기 시작해서 이제는 벚꽃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한 곳인데. 1년 방문객의 80%가 이 벚꽃이 필 무렵에 시작되는 기간에 온다고 하니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동물들은 조금은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친 시기라 그런지 동물원은 한적했다.
몇몇 커플로 보이는 연인들이 다들 비슷비슷한 롱 패딩을 끼어 입고 다니는 모습이 조금은 생경스럽기도 하였지만 어차피 유행과는 거리가 먼 나이기에 내 문제려나 싶어 넘기기로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로 했다.
조류독감은 동물원에도 영향이 있었는지 조류들은 관람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팻말이 여기저기 붙어있었고 접근을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이 볼성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다른 동물들도 몸을 사리는 듯 어딘가 숨어서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다. 서울의 사파리와 다르게 전주 동물원은 꽤나 적막하다. 그 적막함이 마음에 든다.
그저 바닥에 떨어진 풀을 우걱우걱 씹으며 슬픈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네발 달린 초식 생물들만이 내 자취를 쫓을 뿐 대체적으로 고요하기만 한 그 공간에서 사진기를 들고 그네들의 모습을 담는 내 사진도 마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동물들도 외로움을 알 것이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 철창 너머로 자신을 기웃거리는 존재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희망이 없는 그 메마른 생명의 순간이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들의 표정은 반려동물과 확연이 다르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기에 슬프다.
사람들도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철장을 닫고 그 틈새로 서로를 바라본다. 메마른 시선이 종종 나의 마음에 와서 꽂힐 때면 우리는 왜 서로의 끌어안고 마음을 나누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홀로 고독한 존재이기를 자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가두기보다는 풀어놓고 마음껏 들판과 세상을 뛰어놀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일 텐데. 우리는 동물에게 하듯이 우리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일지. 우리는 멸종위기에 닥친 존재들도 아닌데. 스스로 자신을 멸종시키고 있진 않을까.
그런 슬픔의 생각을 한가득 해보았다가 자리를 옮긴다.
엔틱, 또는 고색창연하다. 이러한 수식어로 유명한 동물원 놀이기구.
두 표현은 거의 비슷한 말이지. 오래될수록 그 풍치가 저절로 드러나 보인다는 표현인데 우리말로 약간 쉽게 표현하자면 '추억 돋네'정도인가. 다른 지역의 놀이기구에서는 볼 수 없는 엔틱함이 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름 명물이란 평가도 받고 있고 근처 산 등성이에 올라서 사진을 찍게 되면 대관람차가 나무들 위로 우뚝 솟아올라 있는 게 매력이기도 한 이 놀이기구들은 오랜 시간부터 이 모습이었다.
잊었다 생각했던 여러 추억들이 마음의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잠시 서성이다 다시 또 자리를 옮긴다.
사실 뭔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마음이 정리되기보다는 좀 더 생각의 상념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난다고 마음의 아픔이나 고민들이 바로 없어진다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이라면 고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들 가운데 이 아픔이나 고통도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잊혀지고 또는 잊혀진 척하다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들도 예전에는 지금처럼 아프고 감당이 안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이 연꽃잎처럼. 진흙탕 속에서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연꽃을 피어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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