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 "로마의 효행-키몬과 페로"
동양에는 '효'라는 말이 있지만, 서양에는 이에 맞는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영어 제목은 Roman charity 인데 글자 그대로는 '로마인의 자선'이 되겠죠. 이를 볼 때 서양에서 효라는 개념은 정확히 정의하기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러시아어로는 Отцелюбие римлянки 로서 '로마인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그나마 노어 제목이 효라는 개념과 비슷하게 되어 있군요. 필자는 이 작품의 제목을 '로마의 효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이라 할 정도로 효의 개념이 명확합니다. 한국 전래 동화 효녀 심청도 효에 대한 본보기 아닙니까? 그러면 서양에서는 효의 개념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오늘 루벤스(Rubens, Peter Paul, 1577~1640)의 그림이 그 해답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벤스의 이 작품은 로마의 효행을 대표하는 그림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키몬과 페로라는 제목으로도 불립니다. 이 이야기는 서양화에서 단골로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카라바조는 일곱가지 자비라는 그림에서 이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또한 카라바조 스타일을 따랐던 디르크 판 바뷔렌도 같은 주제로 그린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AD 14~37에 쓴 '후세에 전해줄 만한 아름다운 언행 아홉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막시무스는 로마 사람들에게 도덕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루벤스는 만토바 공작 빈첸초 1세 곤자가에게 고용되어 1600년 5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만토바에서 루벤스에게 주어진 업무는 주로 궁정 미인들의 초상화 같은 르네상스 회화의 복제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601년 8월 루벤스는 곤자가로부터 외교임무를 부여받아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루벤스는 카라바조가 시도한 새로운 바로크 양식을 빠르게 습득했습니다. 또한 1605년 말 두 번째 로마 여행에서는 형 필립과 함께 고대 예술과 문헌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에 착수하여 로마 조각, 부조, 초상화 흉상 및 고대 동전의 상당한 컬렉션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조각상에 대한 많은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1608년 10월,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으로 귀향했습니다. 당시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속국이었는데, 북부의 독립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벤스가 플랑드르로 돌아온 직후에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12년 휴전(1609~21)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휴전은 플랑드르 교회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촉발했습니다. 1610년부터 1620년까지 10년 동안 루벤스는 북유럽 반종교개혁 정신의 주요 예술가로 활동했습니다. 그 덕분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한 제단화가 엄청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기간 동안 루벤스는 신화, 역사, 알레고리 주제, 사냥, 초상화 등 세속 주제의 그림도 많이 남겼습니다. 로마에서의 영향이 반영된 그림 중 하나가 로마의 효행입니다.
이 그림은 에르미타주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그럼 작품을 보실까요?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노인에게 어떤 젊은 아가씨가 자신의 가슴을 내놓고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정말 야한 장면 같죠? 그러나 이는 딸이 아버지에게 젖먹이는 장면이에요. 아버지가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는데, 굶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가 불쌍하여 견디지 못한 딸은, 매일 면회를 신청하여 몰래 젖을 물리어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결국 간수들에게 들키고 황제에게 이 사실이 보고됩니다. 황제는 이 황당한 일의 연유를 알고 싶어 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황제는 딸의 효심에 크게 감동하게 됩니다. 결국 사건 재조사를 거쳐 노인은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루벤스는 1630년에 이 주제의 또 다른 그림을 남겼는데, 여기서는 창문 밖의 간수들이 딸과 노인을 엿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루벤스 사후에 '감옥에서 아버지에게 모유 수유 하는 딸'이란 제목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을 잘 보세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노인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고 했잖아요? 굶어 죽어가는 노인이라면 당연히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어야 하죠? 헉, 이게 왠일입니까? 이 영상 제작자인 학이여인루시보다 훨씬 멋진 근육질 몸매를 갖고 있군요. 더구나 자신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자랑하듯, 육체미 선수처럼 허리를 비트는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젖을 먹기 위한 자세이지만, 자연스러운 포즈는 아니죠. 그럼 이러한 포즈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 그림 작업을 위해 루벤스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스케치한 골동품 동상 '지쳐있는헤라클레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그림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안 라이브러리에 보관되어 있죠. 또한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술취한 노아의 영향도 눈에 띕니다. 그러고 보니 그림 속 노인의 포즈와 많이 닮았네요.
또한 딸의 모습을 보세요. 면회 온 딸은 수수한 옷차림이 아닙니다. 고귀함을 상징하는 붉은 치마, 금빛 나는 소매, 그리고 수놓은 베일을 쓰고 있으며, 곱게 땋은 황금빛 머리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귀한 집 자식인 듯 후덕한 몸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간수들로부터 동정을 사기는 어렵죠. 거꾸로 뇌물을 기대하게 만드는 외모입니다. 그런데 딸의 얼굴을 보세요. 눈은 매우 슬퍼 보이죠. 눈을 더 자세히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불쌍한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연민을 눈물 한방울로 표현했습니다. 이 눈물 한방울이 애로틱한 분위기를 지극한 효성의 이야기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슬픈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인물들은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그려졌습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이것이 루벤스 스타일입니다. 루벤스는 로마 방문 이후, 베네치아 화파의 색채와 미켈란젤로의 역동성을 절묘하게 조합한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주제와 상관없이 남자는 근육질로 그리고, 여자는 풍만하게 그리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강인한 스타일, 즉 근육질의 우아한 체격과 빛과 색채의 감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화려함과 강렬함을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전달해 주죠. 또한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색채의 대조가 이 작품에서도 두드러집니다. 키몬의 검은 옷은 비극을 상징하고, 페로의 붉은 옷은 아버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금빛 신체는 딸의 목숨 건 희생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나타냅니다. 마치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나가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 처럼 말이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는 가정과 국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여인의 지극한 효심으로 사형수를 구한 이야기는 루벤스에 의해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이 작품 해설은 유튭 동영상으로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