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역사 초상화를 남긴 화가는 왜 시베리아로 갈 수 밖에 없었나!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Мр. Ли? Собираемся отремонтировать ворота. Каждый, у кого есть машина, должен заплатить по 500 рублей!"
아파트 단지의 자동차용 자동문이 고장나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차가 있는 사람은 500루블씩 내라는 전화였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의 반장인 표트르였습니다. 표트르는 가이드할 때마다 정말 1분 마다 내뱉는 이름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논할 때 표트르 대제를 빼면, 이빨 빠진 호랑이죠. 그런데, 우리의 반장님이 표트르였던 것입니다. 표트르 대제 말고 표트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표트르 반장은 인상이 강직합니다. 아마 그래서 반장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성격이 드센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조정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덕분에 단지 내에 청소가 안되어 있거나, 보도 블록이 침하되거나, 문이 고장나거나 하면 어느 사이 원상 복구가 되어 있곤 합니다. 일반인들 중에 표트르라는 이름이 드문 것은 왜 일까요? 예수의 수제자와 대제의 이름이 똑같네요. 그런 위대한 이름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부여하기엔 부모들도 부담되겠죠. 아뭏든 표트르는 러시아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오늘 그 표트르와 관련된 그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반 니키틴이 그린 표트르 대제의 임종 초상화입니다. 여러분! 황제의 죽음을 그린 초상화 본 적 있으십니까? 있다구요? 네 찾아 보니 여러 작품이 있군요. 찰스 1세의 죽음도 있고, 네로 황제의 죽음도 있네요. 하지만, 황제가 임종한 순간을 화가가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라면요? 아시는 분 댓글로 남겨 주세요.
표트르 대제의 임종 초상화는 러시아 회화 뿐 아니라 서양미술사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러시아 전 분야에 걸친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철권을 휘둘렀던 표트르 대제. 그가 죽었습니다. 니키틴은 그의 임종 초상화를 그려야만 합니다. 화가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니키틴 외에도 표트르 대제의 임종을 그리도록 2명의 화가가 더 초청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유명 유럽 예술가인 카라바크와 타나우에르입니다. 타나우에르는 니키틴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세 화가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니키틴의 그림이 좀더 현대적이고 정서적이지 않나요? 어떻게 니키틴은 서양 화가들보다 더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그가 러시아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반 니키틴은 168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키타 니키틴은 사제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소년 이반이 크레믈린 무기고에서 운영되는 조각 공방에서 네덜란드 조각가 안드리안 쇼네베크의 지도를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의 재능은 즉시 알려져서 17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그를 독일 화가 이오간 타나우에르에게 배우게 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이반은 서양 회화를 익혔습니다. 1716년 이반은 화가인 그의 남동생 로만과 함께 20명의 영재유학단에 발탁되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습니다. 니키틴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 서양화가 들어온지 겨우 몇년만에 이콘 작법에 따라 그린 파르수나와 완전히 구별되는 바로크 초상화가 궁정에 유행했습니다. 표트르 1세 덕분에 니키틴과 같은 화가가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그를 좋아했습니다. 황제는 외국 손님들이 오면 항상 그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화가가 있소이다."
니키틴은 유럽 회화의 수준에 다다른 최초의 러시아 초상화가였습니다. 서구화에 매진했던 표트르 대제 입장에서 빠른 시일 내에 서양화 수준에 이른 니키틴이 무척 자랑스러웠겠죠. 이렇게 니키틴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 니키틴이 황제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요!
이 그림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황제를 그릴 때는 군사적, 정치적 승리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표트르 대제의 인생을 결산하며, 그가 통치했던 시기와 그 이후 러시아가 나아갈 성격을 규정짓는 기념비적인 초상화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느끼는 것은, 화가가 자신의 개인적 소회를 그림에 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화가의 재능과 황제와의 개인적 인연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 전시실은 러시아 예술의 기원인 이콘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는 바로크 회화이기 때문에 이콘화들과 큰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오롯이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가 만든 결과입니다.
1725년 1월 아침에 니키틴은 겨울궁전으로 불려와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표트르 대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제의 임종 앞에 선 니키틴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을까요? 그는 마라의 죽음 앞에서 선 다비드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부담과 비장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니키틴은 죽어가는 표트르의 얼굴을 주목했습니다. 이 그림이 의뢰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모델에 대한 과장이나 아첨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화가의 재능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는 붓터치 하나 하나에 진심어린 흥분과 죽어 가는 이에 대한 깊은 존경과 황제의 역사적 위치를 우리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해 줍니다.
이반 니키틴은 어떻게 그런 표현력 있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화가는 회화적 기법 뿐만 아니라 작품의 시점과 구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사실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크지 않은 캔버스임에도 불구하고 니키틴은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화가가 아래에서 위로 바라 보는 시점을 선택하고 왼쪽 모서리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대각선을 따라 인물을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람자가 이미지를 우러러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서양에서 배운 유채 물감의 특성과 바로크 수법을 이 작품에 완벽히 구현했습니다. 표트르 대제의 사실적인 모습에 한번 놀라면서도, 붓의 감정적 터치를 느끼게 해 줍니다. 마치 관객은 현장에서 화가가 이 그림을 창작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듯 생생합니다. 니키틴은 많은 궁정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의 최대 작품은 표트르 대제의 임종입니다. 이 작품은 대제의 마지막을 그렸다는 것 뿐 아니라, 바로크 수법을 러시아에서 완전히 소화해낸 수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초상화를 통해서 니키틴은 러시아의 도상학을 대신하는 사실주의 회화의 성공을 이뤄냈습니다.
황제가 죽은 지 몇 년 후, 이반 니키틴과 동생 로만 니키틴은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어 표트르 파벨 요새에 수감되었습니다. 안나 이오아노브나 통치기에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이복 형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왕은 왕권이 약하였기 때문에 음모를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반 니키틴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채찍질하고 시베리아로 보내어 영구히 감시하라."
안나 이오아노브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는 즉시 이반과 로만 니키틴을 유배지에서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은 해를 넘겨 1742 년 1월이 되어서야 시베리아에 도착합니다. 궁정 화가였던 이반 니키틴은 유배지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사망했습니다.
표트르 대제의 임종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긴 화가의 말년이 너무나 애처롭습니다. 하지만, 이반 니키틴은 표트르 대제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을 그려냄으로써, 초상화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생생한 증거를 남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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