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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Feb 05. 2022

사랑하는 장면

엿보는게 더 재밌다. 신났다. 신났어!

Love Scene 

Giulio Romano (Giulio Pippi)

1524/1525

oil on canvas (transferred from panel) 

163x337 cm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한국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중국 사람들은 꼭 보는 그림이 있다면 믿어지십니까?


에르미타주 박물관 매너리즘방에 굉장히 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이 방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진지하게 이 그림 감상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그림이죠. 한국 팀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매너리즘방 자체를 그냥 통과해 버립니다. 위치도 르네상스방과 라파엘로 회랑 사이의 어정쩡한 곳이어서 더욱 무시되기 쉽상입니다. 한편으론 매너리즘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조여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낄낄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뭐야? 한국인도 모르는 걸 가지고 저렇게 웃고 난리라니! 한국보다 문화수준이 떨어지는 당신들이 웃으며 감상해? 허세 아니야?"


속으로 그러면서 그냥 지나쳐 버릴 때 뒤통수가 따끔거리곤 했죠. 가끔 우리 손님들끼리 이렇게 말하는게 귓가에 들리기도 합니다.


"저 그림 유명한가봐?"

"그러게, 뭐가 그렇게 재밌지?"


그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그림을 왜 설명 안해주고 그냥 지나가요?'


자존심 상했죠.


"솔직히 이 그림 잘 몰라요."


이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늘 지날 때마다 식은 땀 나게 하는 이 그림, 중국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이 그림을 반드시 알아 내고 싶었습니다. 시즌 끝나고 해야 하는데, 겨울에는 심신이 지쳐 쉬고 싶다보니, 조사하지 못한 채 또 다시 시즌을 맞이하길 반복하다가 드디어 자료가 정리되었습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제목은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좀더 자세히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제우스가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 나간 사이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하여 사랑을 나눕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들이 헤라클레스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불륜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되겠습니다.

Love Scene,   Giulio Romano, 1524/1525 에르미타주


화가 줄리오 로마노는 전에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의 삽화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에로틱한 장면의 묘사에 매우 뛰어났던 화가였습니다.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는 개는 표정도 자못 심각한데다, 불륜 현장을 노파에게 고발하는 듯 앞발로 노파를 긁고 있습니다. 충성심을 상징하는 알레고리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노파는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이 장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표정은 심각해 보이지 않네요. 뭘까요? 젊은이들의 정사를 훔쳐 보는 재미에 폭 빠진 얼굴입니다. 가운데 고양이는 마네의 '올랭피아'에서도 등장하는 그 놈입니다. 에로틱한 분위기의 서양화에서 자주 출현하는 고양이. 고양이는 에로스를 상징합니다.

줄리오 로마노 1499~1546


줄리오 로마노는 라파엘로의 수제자로서 바티칸의 라파엘로 회랑 프레스코화를 담당했습니다. 마침 에르미타주 매너리즘방을 지나면 그 바티칸의 회랑을 복제한 라파엘로 회랑이 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회랑 장식의 특징이 그로테스크 장식인데요. 줄리오 로마노는 그 회랑에 사용되었던 그로테스크 장식을 이 그림에도 쓰고 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이며, 세부적인 묘사가 뛰어난 이 그림에는 정교한 장식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침대의 난간에는 괴물의 얼굴과 넝쿨 장식이 있습니다. 침대의 다리에도 역시 당초문 장식과 함께, 사튀로스와 님프가 뒤엉켜 있는 장식이 있습니다. 사튀로스와 님프는 사실 이후에 또 다시 자행될 제우스의 애정 행각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제우스와 안티오페 이야기인데요, 제우스는 사튀로스로 변장하여 안티오페를 범하거든요. 이 정도면 제우스는 신 중의 신이면서 정욕의 화신입니다. 신화를 읽어 보면 제우스의 자식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상당 부분 차지함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제우스가 여기 저기 씨를 뿌리고 다니며, 수많은 새끼 신과 영웅을 탄생시켰으니 당연한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라파엘로 회랑, 에르미타주


줄리오 로마노는 다 폰토르모와 함께 16세기 초기 매너리즘을 시작한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너리즘 사조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모호한 관점(원근법의 파괴), 뒤틀린 자세, 중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부유하는 느낌, 비이성적인 공간 구성, 비현실적인 외광 등, 조화와 균형과 이성을 중요시했던 르네상스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진 시기입니다. 오늘 그림에서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뒤틀린 자세, 그리고 사선으로 드리워진 커튼이 드라마틱한 느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누드 및 커튼에 나타난 비현실적인 외광 또한 매너리즘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체의 누드는 보통 혈색이 도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 누드는 창백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들뜬 듯한, 외계의 광선을 쏘인 듯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커튼의 광택 또한 세밀한 묘사가 뛰어남과 동시에 이 땅에서 만나는 익숙한 색감이 아니기 때문에, 이질감 즉 신화적인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느낌을 강화해 주죠.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다 폰토르모 1526~1528 티에자 산타 펠리치타 피렌체


이로써 중국인들이 왜 웃었는지 상상이 되실 겁니다. 매너리즘 표현이 너무 훌륭해서 탄성을 내 지른 건 설마 아니겠죠? 아마도 바람피는 제우스와 관음증 노파 얘기를 들으며 웃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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