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화-일상을 예찬하고 건축공간을 발견하다!
여주인과 양동이를 든 하녀
서양미술사 책을 읽다 보면, 장르화라는 용어를 만나게 됩니다. 보통 장르라고 하면, 예술의 종류를 의미하죠. 예를 들어서 영화에서는 액션, 범죄, SF, 코메디, 공포, 멜로 등의 장르가 있어요. 그림에서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추상화 등의 장르가 있고요. 그런데 장르라는 말이 미술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화풍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장르화가 그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을 이해하려면 장르화라는 말을 알아야 하니까요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매너리즘, 심지어 바로크 시대에도 회화의 주요 장르는 여전히 역사화였습니다. 역사화는 역사 뿐 아니라, 신화와 성경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역사화가 아닌, 서민의 일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런 세속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풍속화라고 하는데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를 장르화라고 합니다. 지금은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이면 다 장르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왜 네덜란드에서 세속적 그림이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요?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무역으로 부를 거머쥔 대 상인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방편으로서 그림을 수집했는데요, 그들의 관심사를 담은 세속 생활이 그림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더 이상 종교 주제가 선호되지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를 장식할 그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네덜란드가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나 시민 국가를 수립하면서 서민 경제가 활성화된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네덜란드로 다양한 물건들이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민들도 풍족한 물질 문명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예술가들과 미술상들은 예술을 좋아하는 집단과 기호가 달라진 것에 민첩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에 따라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 등 서민들이 좋아할 만한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웅이 아닌 이름 없는 서민이 주제로 자리잡은 것은 세속화 경향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두각을 나타난 화가들은 누구일까요?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란스 할스(1581-1666)는 초상화에서,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헤다(1594~1680)는 정물화에서, 네덜란드 바로크를 완성한 렘브란트(1606-1669)는 초상화와 성경 주제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풍경화 분야에서는 루이스달(1628~1682)이 활약하였으며, 중산층이나 농민 생활을 주로 그린 얀 스텐(1626-1679), 그리고 빛의 효과를 살린 실내 풍경화로 유명한 페르메이르(1632~1675)와 피터르 드 호흐(1629-1684)는 장르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이들 중에서 페르메이르와 피터르 드 호흐는 델프트 화파로 따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성누가 델프트 길드 소속으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가 방앗간집 9번째 아들이었는데, 호흐는 로테르담에서 벽돌공의 다섯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요. 호흐는 암스테르담 근교 도시 하를렘(Haarlem)에서 풍경 화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헴(Nicolaes Berchem, 1620-1683) 밑에서 수학합니다. 1650년부터 그는 로테르담의 린넨 상인이자 미술 수집가인 주스투스 들 라 그홍주(Justus de la Grange)의 전속 화가이자 피고용인으로 일합니다. 주인을 따라 그는 헤이그, 레이덴, 델프트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아마 호흐의 작품 대부분이 그홍주에게 헐값으로 넘어갔을 겁니다. 이는 가난한 화가들을 이용하는 당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호흐는 1652년 부터 10년간 델프트에서 작품 활동을 합니다. 1654년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낳았고, 거기서 성누가 델프트 길드에 가입합니다. 호흐의 화가 경력을 로테르담 시기(1629-1652), 델프트 시기(1652-1661), 암스테르담 시기(1661-1684)로 나눌 수 있는데요, 델프트 시기에 델프트 화파로서의 명성이 만들어 집니다.
호흐는 열린 문의 화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집들이 죄다 문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의 개방적인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당시 델프트 지역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죠. 델프트 시기에 화가는 개방적이고, 소박한 가정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주로 현모양처의 미덕을 칭송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모의 활동은 대부분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낙의 일상을 담은 건축 공간의 매력을 발견한 화가는, 몇가지 장치로 평범한 공간을 특별한 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화가는 작은 실내 풍경에도 원근법을 정밀하게 적용함과 동시에, 외부의 풍경을 마치 실내 풍경인 것처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내부와 외부를 중첩시킨 공간 구성이 특징이며, 내부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하여 아늑하면서도 깊이 있는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치밀한 원근법으로 구성된 실내 공간과 빛의 조합은 회화사에 남을 만한 업적입니다. 이러한 호흐의 화법은 페르메이르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례로 호흐의 ‘앵무새와 연인(1668)'에서 출입문을 어둡게 묘사한 반면, 실내는 밝게 하여 인물들의 활동을 주시할 수 있게 해 주는데요, 페르메이르의 작품 '연애편지(1668~1669)'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흐의 집은 항상 개방적이고 온화한 빛이 감싸고 있습니다. 안뜰에서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뜨개질 하는 여주인과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는 하녀가 보입니다. 어린 하녀는 여주인에게 저녁 식사 거리로 생선을 보여줍니다.
'마님, 오늘 이 생선을 잡으려고 하는데 어떠신지요?'
'싱싱해 보이는구나. 잘 준비해 보렴.'
창문과 현관문은 열려 있고, 그 앞에 격자 형태로 포장된 안뜰이 있고, 반쯤 열린 문을 나서면 벽돌을 깔아 놓은 앞마당이 있으며, 열린 대문을 나서면 저 너머 운하의 제방이 있는데, 운하 건너 편의 행인들의 모습까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열린 문들을 통해서 바깥 공기가 안으로 흐르듯 전달됨으로써 막힘 없는 개방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대문, 울타리, 창문, 문, 격자 바닥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패턴들 때문에 공간은 리듬을 타고 있습니다. 모든 문을 열어 둠으로써, 화가는 감상자들로 하여금 도심 속의 아늑한 공간을 따라서 걸어오라고 초청하는 듯 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잠시 들러서 목을 축이고, 배고픈 사람은 한 끼 들고 가라는 마음씨 좋은 주인의 성품이 드러나네요. 밝은 빛으로 가득 찬 분위기에서 모든 색상은 순수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호흐의 작품에서 우리는 투명한 공기가 흐르는 내외부가 통합된 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디테일의 묘사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납니다. 생선을 담은 양동이를 보세요. 마구 쓰는 물건을 궁전에서만 사용할 것 같은 황금 용기로 묘사했습니다. 뜨개질 거리를 담은 바구니는 어떻습니까? 날실과 씨실이 정교하게 엮인 금빛 바구니에서 화가의 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뜰의 울타리에 세워진 화분과 꽃도 대충 그리지 않고, 줄기와 이파리와 꽃잎을 섬세히 묘사했습니다. 화가가 작은 소품에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죠. 또한 자세히 보면 여주인과 하녀 모두 값비싼 진주 귀고리를 달고 있습니다. 인자한 여주인은 머리핀을 이쁘게 꽂고 있고, 하녀의 모자는 금빛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호흐는 중산층 여인과 하녀에게 성모님께 바쳐질 만한 고상함을 부여했습니다.
화가는 델프트의 일상 생활을 캔버스에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네덜란드 부르주아 가정의 본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개신교도로서의 검소하고, 아늑하고, 질서정연하고, 깔끔하며, 나그네를 환대하는 서민의 미덕을 선보인 것입니다. 화가 자신은 네덜란드 하층민 출신입니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호흐에게는 일상의 행복이 깃든 평범한 가정이 천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검소와 절제의 미덕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색되어 갔습니다. 네덜란드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추구하는 미덕이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빈부 격차도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네덜란드 황금시대 이면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호흐는 일상의 행복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 하며, 자신의 그림에 그 시대의 편린을 남겨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