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집필 장소
세베랴닌 식당에서 조금 걷다 보면 우리는 네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 죄와 벌 집필 장소가 있다. 지금은 이발소 간판이 보이는 이 평범한 아파트에서 인류 문학 최고의 작품이 탄생하다니! 이곳은 올론킨이라는 상인이 만든 임대주택이다. 당시 자본이 있는 상인들은 임대주택을 건설하여 큰 재미를 보았다. 많은 지방 농민들이 센나야 광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많은 임대주택들이 들어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지금까지 대부분 아파트인데, 외관은 그럴 듯 하지만 내부는 작은 방들을 모아 놓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귀족들이 사는 넓은 거실이 있는 저택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방 3~4개에 거실이 딸려 있는 아파트를 임대하여 하녀까지 고용하며 살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도 그랬다.
이 건물에는 도스토옙스키를 기리는 화강암 현판이 부착되어 있다. 새겨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집에서 1864~1867년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다.
여기서 소설 죄와 벌을 썼다."
올론킨 임대주택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과 '도박사'를 완성했고, 두번째 부인이 될 안나 스니트키나를 만났다. 그 당시 이 아파트는 3층이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대문 위 2층에 살았다. 채권자들에게 쫓기던 도스토옙스키는 스텔롭스키라는 출판업자와 책 계약을 맺었다. 그때까지 도스토옙스키가 쓴 소설에 대한 권리를 모두 넘기고 1년 안에 새 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일시금 3000루블을 받았다. 그 돈으로 일부는 빚을 갚고, 일부는 형 가족 부양에 쓰고, 일부는 의붓 아들 파벨에게 주고, 나머지는 또 다시 도박으로 탕진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계약 기간이 26일 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기한 내에 책을 쓰지 못하면 앞으로 출간되는 모든 책에 대한 권리는 스텔롭스키에게 넘어갈 판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각 장을 나누어 대신 써줄테니 엮어서 출판하라고까지 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의 양심상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속기사 고용을 제안했다. 당시 속기학원을 갓 수료한 20세 여성 안나가 이 일을 소개받고 올론킨 저택으로 오게 된다. 건강 악화로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져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녀는 천사가 되어줄 것인가! 이미 저명인사였던 도스토옙스키를 존경했던 안나는 헌신과 열성으로 도스토옙스키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가 몇 날 못 되어 그만 둘 것이라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처음에 안나의 얼굴조차 쳐다 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그는 안나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이름을 묻곤 했다. 곧 그만둘 거란 생각에 이름조차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나는 게의치 않고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그들의 작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보통 밤새 작업하고, 새벽에 잠이 들어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 패턴이었다. 오후 1시 쯤에 만나서 도스토옙스키가 구술하고 안나가 속기로 받아 적는다. 구술이 끝나면 안나는 집에서 속기한 것을 정서하여 다음 날 도스토옙스키에게 보여주고 검토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안나는 성실하게 그날 그날의 진행율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알려 주었다. 의외로 빠르게 목표가 달성되어 가고 있음을 안 도스토옙스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와 작업한지 일주일이 지나자 그녀의 이름을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결국 26일 만에 '도박사'를 완성하여 불공정 계약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다음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했을까? 똘똘한 안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죄와 벌' 마지막 호 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월간지 '러시아 통보'에 죄와 벌을 연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안나를 붙잡아 둘 구실을 찾은 것이다. 이는 안나가 영리해서만은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녀를 하늘이 보내준 천사라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안나가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자, 일단 붙잡아 두는데는 성공했고, 이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둘의 나이 차이가 도스토옙스키에겐 큰 고민이었다. 그 당시 45세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작가는 안나에게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주인공은 쓸모 없는 늙다리에 지병으로 고생하는 우울하고 의심 많은 예술가인데, 모델로 고용된 젊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이겠느냐는 요지였다. 그러자 안나는 왜 안되느냐, 사랑을 꼭 외모와 재산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대답하였다. 그 대답에 힘을 얻은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이 예술가를 나로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나의 아내가 되어 달라 부탁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나라면 당신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어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 안나 스니트키나 저, 최호정 역, 엑스북스
이렇게 도스토옙스키의 조심스런 사랑고백은 받아들여지고, 둘은 결혼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나이 45세, 안나는 20세였다. 많은 노문학 전공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줄여서 부른다.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2글자로 줄이면? 도~끼. 3글자로 줄이면? 도둑놈. 도끼는 당연히 라스콜리니코프의 살해 도구를 연상한 것이고, 도둑놈은 25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젊은 여인을 아내로 얻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물론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한 소설은 씌여지지 않았다!
안나와의 결혼 생활이 도스토옙스키 인생에서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두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고(네 명 중 둘만 살아남음), 간질 발작도 줄어들었고, 도박도 끊게 되었고, 스타라야 루사에 별장도 갖게 되었으며, 도스토옙스키 사망 1년 전에 모든 빚을 다 갚았다. 안나 스니트키나는 이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이라는 회고록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아내의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이 회고록은 전체적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성자 또는 현인과 같이 묘사하였지만, 젊은 아내에 대한 질투심까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기록은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꼭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