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며 두꺼운 빙하가 녹기 시작하더니,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거침없이 빙상들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는 맘모스 떼가 두꺼운 얼음 속에 파묻혔으며, 지금의 핀란드와 러시아 북부지역에서는 빙상의 경로를 따라 수많은 강과 호수가 생겼다. 그 중 라도가호와 오네가호는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황무한 호숫가 늪지대와 수많은 섬으로 사람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제일 먼저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은 스웨덴이었다. 그러다 노브고로드 공국이 팽창하면서 발트해와 라도가호 및 오네가호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오랜 싸움 끝에 1323년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국은 뇌테보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했다. 이렇게 하여 라도가호와 오네가호를 포함하는 카렐리야 지역은 러시아 땅이 되었다.
이후에도 스웨덴과 러시아의 싸움은 지속되어 카렐리야 지역은 여러 번 운명을 달리했다. 이반 3세 때인 1478년에 노브고로드 공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병합되면서 카렐리야의 주인도 바뀌었다. 이후 18세기 초 표트르대제 때,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이 일대는 러시아 영토로 굳어졌다.
카렐리야의 원시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으나, 불모지와 다름 없는 이 지역을 가꾼 이들은 대부분 정교 신앙을 가진 농부와 어부들이었다. 원래 천둥신 페룬을 믿던 러시아인들은 988년 비잔티움으로부터 정교를 받아들여 개종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비잔티움의 대를 잇는 정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러시아 촌락은 통나무집으로 대표되는 목조건축 전통이었다. 그 마을 중심에는 어김없이 성당이 들어섰다. 공후나 유력한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경우 석조 성당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대부분 목조 성당이었다.
끝없는 초원, 울창한 자작나무 및 소나무 숲 그리고 수많은 호수와 하천들이 어우러져, 하늘과 땅이 맞닿는 그 곳에 마을과 성당이 있다. 성당은 자연과 인간이 어울리어 신과 만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의 영성을 떠올릴 때면 러시아인들은 늘 키지섬을 동경하였다.
호수와 자작나무 숲
촌락의 목조주택과 목조성당
오네가호의 키지섬은 마법의 성 같은 목조성당들이 있는 곳이다. 이 뛰어난 성당들은 중세 목조건축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 나무로 지은 이 대담한 성당은 우리로 하여금 옛 장인들의 재능을 찬탄하게 만든다.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듯 우아한 성당의 자태는 정교한 목공예 뿐 아니라 자연 환경과의 절묘한 조화로 인해 보는 이들의 넋을 빼놓는다. 어찌 러시아에 와서 키지섬을 순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키지섬은 오네가호에 있는 1,650개 섬 중 하나이다. 오네가호는 유럽에서는 라도가 호수 다음으로 큰 호수이며, 면적이 9,700km2 에 달한다. 러시아 카렐리야 공화국 수도인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배를 타고 오네가호를 가로질러 키지섬에 다다를 수 있다. 키지섬은 면적 5km2, 길이 6 km, 폭 1km의 기다랗고 작은 섬이다. 오네가호의 투명한 물과 파란 하늘이 만나는 그 지점에 마치 수백 개의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선경이 황홀하다.
오네가 호수로 둘러싸인 키지섬
페트로자보츠크에서 쾌속정을 타고 키지섬에 도착하면, 맑은 호수에 둘러싸인 푸른 초원, 우뚝 선 목조 성당 그리고 통나무집들이 우리를 반긴다. 섬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신성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별천지에 와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키지섬 유적지는 루스키예 자오네지야 Русские Заонежья, 바실례보 Васильево, 푸도쥐스키 Пудожский, 얌카 Ямка 등을 포함한 총 9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18~19세기 목조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섬에서 지은 것도 있으나 목조건축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온 집들도 있다. 성당, 공소, 주택, 대장간, 헛간, 방앗간 그리고 사우나 등의 용도이다.
이중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루스키예 자오네지야에 있는 건축물들이다. 이곳에 키지 포고스트(Kizhi Pogost)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다. 키지 포고스트는 '키지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주변모성당(The Church of the Transfiguration), 성모가호성당(The Church of the intercession), 종탑(The bell tower) 그리고 울타리가 포함된 영역이다. 무명의 장인이 도끼 하나만으로 세계 건축사에 남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키지 포고스트는 러시아에서는 19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교외 궁전들에 이어 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나무로 된 다각형 울타리 안에 목수 오시포프(S. Osipov)가 세운 종탑이 있고, 그 양쪽에 두 채의 성당이 들어서 있다. 두 성당 중 성모가호성당은 겨울 교회이고, 주변모성당은 여름 교회이다. 마을 사람들과 순례객들은 겨울에는 성모가호성당에서, 여름에는 주변모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겨울 교회는 단열을 잘 하여 따뜻함을 유지하고, 여름 교회는 통풍이 잘 되는 시원한 구조이다.
성모가호성당은 1764년에 지어졌으며, '선박형'의 단순한 구조로서 제단이 있는 동쪽 부분은 '정팔각형 프리즘' 형태로 솟아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목조건축은 박공형인데 비하여, 이 성당은 왕관같은 8개의 우아한 돔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8 개의 돔이 27m 높이의 양파모양 중앙 돔을 둘러싸고 있다.
30 미터 높이의 종탑은 높은 입방체의 전통적 '정팔각형' 형태이다. 종탑이 구조물의 머리 부분을 장식한다. 9개의 기둥이 박공형 지붕을 받치고 있고, 지붕 꼭대기에는 양파 모양의 돔이 얹혀져 있다.
키지 포고스트
왼쪽부터 종탑, 주변모성당, 성모가호성당
성모가호성당
그러나 키지 포고스트에서 우리를 진정으로 감탄하게 만드는 작품은 주변모성당이다. 연대기 자료에 의하면 주변모성당은 1713-14 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 형태 위에 팔각형 지붕을 쌓아 올린 구조이다. 중앙 돔 높이가 37m에 달하는 이 성당의 입면은 다층, 다단 돔 및 단일 블록 구조의 걸작품이다. 다양한 크기의 양파 모양 돔 22개가 3층으로 배열돼 하늘을 찌르고 있다.
장인은 기발한 착상을 구현했다. 돔들을 오래 보노라면 성당이 로케트처럼 하늘로 쏘아올려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3층으로 된 돔의 수직 줄이 8개가 있는데, 어떤 줄은 돔이 큰 것에서 작은 것 순으로, 어떤 줄은 작은 것에서 큰 것 순으로 배치됨으로써 나타난 착시현상이다. 또 하나의 시각 효과는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성당이 똑같다는 것이다.
돔의 외장재로 사용되는 나무 기와를 레메흐(лемех)라고 한다. 사시나무로 만든 이 기와는 숙련된 목수가 하루 30개 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성당 하나를 짓는데 약 2년이 걸렸다고 한다. 보통 성당의 돔이 1~ 5개 정도였으므로, 22개의 돔을 가진 주변모성당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
목조건축물이 비와 습기에 상하지 않도록 배수 시스템을 고안한 장인의 솜씨 또한 기발하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나무 기와의 경사를 따라 흘러 내려간다. 그러면 그 아래 돔의 기와에서 물을 받아 또 아래로 내려 보낸다. 이렇게 3층 돔 구조의 흐름을 따라 가면서 기와, 용마루, 처마 등의 많은 장식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물길을 홈통으로 연결하여 물을 밖으로 배출함으로써, 실내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 준다.
주변모성당의 다단 돔
나무 기와(레메흐)로 만든 돔
왼쪽부터 주변모성당, 종탑, 성모가호성당
이러한 목조성당을 경이롭게 생각한 나머지, 지역 주민들은 성당을 지은 장인 네스토르(Nestor)에 대한 전설을 탄생시켰다. 그 지방 전설에 따르면, 네스토르는 도끼만 사용하여 단 하나의 못도 없이 주변모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네스토르의 전설은 이러하다.
'오네가호 반대편 사람들이 어느 날 키지섬을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성당을 불태웠다. 세월이 흘러 성당이 있던 자리는 덤불로 무성하였고, 사람들은 성당을 다시 짓기로 결의하였다. 네스토르 장인이 그 덤불 근처를 지나다가 성경을 발견하였다. 그 자리에서 끼니도 거른 채 밤새워 성경을 읽었는데, 아침 해가 뜨고 이슬이 맺힐 때, 덤불과 이슬 위로 성당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환상을 보았다. 네스토르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벼락 맞은 그 곳은 불길하다며 거부하였다. 네스토르는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성당을 완성하였다. 봉헌예배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은 또 거부하였다. 이에 장인은 성당 지붕으로 올라가 돔의 십자가에 빨간 리본을 묶고는, "이 기이한 성당은 어디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과 함께 도끼를 호수에 던지고는 사라져 버렸다.'
성당이 봉헌되는 순간 장인이 도끼와 함께 기적처럼 사라진 것은 건축가의 육체가 성당과 하나되었음을 의미한다. 주변모성당에 얽힌 네스토르의 전설은 순수한 러시아인들의 신앙심을 보여준다. 주변모성당은 네스토르 장인의 혼이며, 푸른 호수로 둘러싸인 키지섬은 러시아 영혼의 풍경이다. 네스토르가 주면모성당과 하나가 된 것 처럼, 주변모성당은 키지섬과 동화하여 불멸의 유산이 되었다. 오늘도 투명한 오네가호 위에 고요히 떠 있는 키지섬은 지상 낙원을 한번 맛보지 않겠느냐며 전세계 순례자들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