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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Mar 22. 2021

북방의 베르사유라 불리는 황제의 마을 예카테리나 궁전

화려함의 극치 호박방을 꼭 관람해 보자!

황제의 마을 어귀에 있는 푸시킨 동상
차를 타고 이집트 대문을 지나 황제의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약간 경사진 아스팔트길 끝에서 옥색 외벽과 황금 대문을 가진 궁전이 우리를 반긴다.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 정원길을 따라 두리번 거리며 궁전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는 뜻 밖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 S. Pushkin, 1799~1837) 동상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실은 항상 슬픈 것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한 그리워지리니


벤치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 채 고뇌하던 그는 마침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 한 구절을 끄집어 내었으리라.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을 푸시킨이라 한다 들었을 때, 시인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내 푸시킨이 청년시절을 이 도시에서 보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궁전부속기숙학교에서 귀족수업을 받고 성장하여, 장차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 될 것이었다. 러시아 뿐 아니라, 심지어 코카서스 지방과 크림반도에 이르기까지, 푸시킨의 발길이 닿는 곳은 어떻게든 기념이 되고 있는 바, 푸시킨이 1811~1817년까지 살며 공부한 이곳을 러시아가 그냥 놔둘 리 없다. 1937년, 즉 시인 사망 100주년 되는 해에 이 도시의 이름은 '황제의 마을'에서 '푸시킨'으로 바뀐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황후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황제의 마을'이었다. 이름이 재미있지 않은가? 황제의 궁전도 아니고, 황제의 마을이라니? 황제와 마을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조합된 과정이 있다.  이곳은 17세기에 스웨덴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1672~1725)가 18세기 초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때까지 이곳에는 Saris Hoff(핀란드어- 고지대 저택)라고 하는 농장이 있었다. 1710년에 표트르 대제가 이 지역을 왕실 영지로 편입함에 따라 왕궁 및 시종들을 위한 정착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바로 Saris Hoff는 Sarskoye Selo(고지대 마을)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궁전 건립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Tsarskoye Selo(황제의 마을)라 불리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러시아어로 Saris와 Tsar의 발음이 비슷했던 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궁전을 지어, 자신의 두번째 아내가 될 예카테리나(Catherine I, 1684~1727)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예카테리나 궁전이라 명명했다.  예카테리나는 리가의 농노출신으로 표트르 대제의 눈에 들어 그의 아내가 될 뿐 아니라, 표트르 대제 사후에는 예카테리나 1세로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현재의 예카테리나 궁전을 지은 옐리자베타 여왕

이후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사이에 태어난 옐리자베타(Elizabeth, 1709~1762)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마을은 대대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여왕은 러시아를 서구화시킨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고,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 러시아를 자랑하고 싶었다. 이에  여왕은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겨울 궁전, 여름 궁전 그리고 예카테리나 궁전을 동시에 새로 짓는 대건축공사에 착수했다. 당시 유럽은 바로크 양식이 유행했다. 역동적인 조각과 넝쿨 장식은 절대군주의 뻗어나가는 힘을 과시하는데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옐리자베타 여왕은 바로크의 대가였던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F. Rastrelli, 1700-1771)를 기용했다. 306m에 달하는 웅장한 궁전 건축은 1744~1756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에 이어, 북방의 베르사유라 일컬어지는 궁전을 얻게 되었다. 이 외에도 옐리자베타 여왕은 7년 전쟁에 개입하여 독일을 궁지에 모는 등 큰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개인에 대한 안좋은 평판도 있다. 여왕은 왕좌에 있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였다 한다. 많은 애인을 두어 쾌락에 탐닉했고, 지나친 건축공사로 국가재정을 거덜내어 외국에 큰 빚을 졌다. 옐리자베타 여왕 사후 방을 정리했 때, 왕복이 무려 3만벌이나 나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예카테리나 궁전이 현재는 세계적 관광자원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예카테리나 궁전 중앙계단실
대연회홀 천장화

궁전의 중앙 계단실을 오를 때, 우리는 우아하고 역동적인 바로크-로코코 장식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 18세기 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유럽 영화에 나올 법한 화려한 계단이다. 그런데 이 계단실에서 특이한 것을 보게 된다. 중국과 일본 도자기가 양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궁전과 중국 풍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된 연유가 있다. 18세기에 유럽에서는 바로크에 이어 로코코 양식이 유행했는데, 로코코 양식은 세련되고 이국적인 중국 풍을 선호했던 것이다. 표트르 대제 뿐 아니라, 옐리자베타 여왕도 이 유행을 따라 중국 풍을 수집했다. 중국 풍으로 궁전 내부의 일부를 장식했으며, 후정에는 중국 마을까지 두었다.

중앙 계단실을 올라 작은 전시실(Exhibition Room)을 지나면 우리는 금빛 찬란한 대연회홀(Great Hall)을 만나게 된다. 800m2의 넓은 이 방은 무도회나 대연회가 펼쳐지던 곳이다. 연회홀 바닥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쇼스타코비치 왈츠가 떠오르며, 그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싶어진다. 드레스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천장에는 이태리 화가 주세페 발레리아니(G. Valeriani, 1708–1762)가 그린 러시아, 승리, 평화 알레고리의 천장화가 있다. 사방 벽면은 황금 나뭇가지와 넝쿨 장식으로 치장했으며, 2단의 커다란 창들과 창 사이를 꽉 채운 거울들은 마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을 연상케 하지만, 화려함 면에서는 예카테리나 궁전이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한다. 창밖으로 사시사철 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무도회와 연회를 즐겼을 귀족들이 부러운가? 하지만, 이러한 삶을 지탱해 준 수많은 종들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이 방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예카테리나 궁전 대기실
예카테리나 궁전 녹색 응접실
예카테리나 궁전 황금종구 Golden Ampiliads

대궁전의 방은 총 55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중요한 방으로서 리옹방(Lyons Hall), 아라베스크방(Arabesque Hall), 대기실들(Antechambers), 기사의  방(Chevalier Dining Room), 붉은 기둥의 방 및 녹색 기둥의 방(Crimson and Green Pilaster Rooms), 호박방(Amber Room), 갤러리홀(Picture Hall), 녹색응접실(Green Dining Room), 청색중국응접실(Chinese Blue Drawing Room), 궁전예배당(Palace Chapel) 등이 있다. 원래 바로크풍으로 지어진 예카테리나 궁전은,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the Great, 1729~1796) 때 일부 실내 공간이 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었다. 그 대표적인 방이 아라베스크방과 녹색응접실이다. 녹색응접실에서 우리는 앞뒤의 실내 풍경이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걸어왔던 복도를 뒤돌아 보면 바로크의 화려한 황금종구(黄金縦口, Golden Ampiliads)가 원근감 있게 펼쳐지는 반면, 다시 눈을 돌려 녹색응접실을 보면 고전주의의 단아함을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바로크와 고전주의 스타일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과 정원
예카테리나 궁전 후정의 중국 마을
예카테리나 2세 때 지은 카메론 갤러리
예카테리나 정원 해군성

궁전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예카테리나 정원으로 이어진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후정은 자로 잰 듯, 질서정연한 정원수와 좌우대칭형 배치가 인상적이다. 여기서 궁전을 따라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울창한 가로수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 가로수길 좌우로 다양한 테마 정원들이 등장한다. 고대의 느낌이 강조된 개인 정원(Private Garden), 중국 풍을 반영한 중국 마을(Chinese Village), 가로수길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고전 조각상들을 배치한 화강암 테라스(Granite Terrace), 깨진 우유병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소녀상과 그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샘, 숲속의 작은 시내와 오솔길들, 르네상스를 연상케 하는 팔라디오 류의 대리석 다리(Marble Bridge), 이슬람 양식을 따른 터키탕(Turkish Bath) 그리고 중세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해군성(Admiralty) 등을 보게 된다. 또한 예카테리나 여제는 정원에 부정형의 커다란 인공호수를 조성하게 하였다. 청둥오리 떼가 자맥질하는 한적한 호수에 느닷없이 곤돌라가 등장하여 유유히 물살을 가를 때, 우리는 베네치아에 와 있는 듯 어리둥절해 지기도 한다. 한편 예카테리나 궁전의 서쪽 날개 부분에는 인상적인 그리스 신전 형태의 건축물이 직각으로 붙어 있다. 카메론 갤러리이다. 계몽군주로 자처한 예카테리나 2세는 고전주의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건축물을 건축가 찰스 카메론(C. Cameron, 1745~1812)에게 의뢰한다. 호수를 바라보며 철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것. 그 결과 그리스 신전 및 로지아 형태의 갤러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카메론은 그 갤러리에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 및 정치가들의 흉상을 배치하여, 여제의 주문에 완벽하게 대응했다. 예카테리나 정원은 다양한 문명을 아우르는 풍경을 갖게 되었다. 이는 17세기 바로크풍과 18세기 로코코풍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예카테리나 궁전 호박방
호박방의 섬세한 조각과 장식

하지만, 예카테리나 궁전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호박방' 관람이다. 호박 보석으로 치장한 이 방은 전세계 유일의 럭셔리 보석방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사치와 향락을 대표한다. 원래 호박방은 러시아 것이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할 무렵, 독일은 프로이센 공국이 왕국으로 전환되며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다. 두 신흥 세력은 마침내 손을 잡았다. 그 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ederick William I, 1688~1740)가 통치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보다 연하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표트르 대제를 흠모하였기에 두 나라가 동맹을 맺을 때 큰 선물을 준비했다. 무려 표트르 대제의 서재를 장식할 호박보석패널을 선물한 것이다. 프로이센 공국 시절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였는데, 이곳은 호박 원산지로 유명했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이 도시는 소련에 편입되어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러시아가 호박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이 호박 서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에 존재했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장식의 지나친 화려함은 곧 식상함으로 연결되기 쉽다. 지상 최고의 번쩍이는 황금장식을 보았기 때문에 그 다음 보이는 것은 시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옐리자베타 여왕은 고민에 빠진다. 금도금 넝쿨 장식 못지 않은 화려한 장식은 없을까? 여왕은 감히 아버지의 호박 서재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호박 서재는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옮겨져서 호박방으로 재탄생한다. 호박방의 경이로움은 단순히 벽에 호박 보석을 대량으로 부착한 것에 있지 않다. 호박 보석의 색상과 투명도가 다양하다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정교한 호박 세공품과 호박 조각품으로 빈틈없이 구성된 커다란 작품 패널이라는 데에 그 위대성이 있다. 이 때부터 호박방은 유럽 그랑 뚜르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으며, 러시아에서는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예카테리나 궁전

그러나 호박방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큰 화를 입게 된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련시절 이름) 외곽의 예카테리나 궁전을 비롯한 다른 궁전들을 점령했다. 그 기간 황제의 마을 궁전과 공원은 파괴됐고 많은 유물들이 약탈당했다. 그 약탈물 중에는 안타깝게도 호박방이 포함되었다. 호박방은 그 옛날 처음 만들어졌던 장소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옮겨졌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잃어버린 유물들을 찾기 위해 독일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많은 유물들을 되찾지 못했으며, 호박방도 같은 운명이었다. 호박방은 사라진 것이다. 결국 소련은 호박방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복원을 결정했다. 25년간의 꾸준한 작업 끝에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마침내 호박방 복원에 성공하고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그 옛날 왕가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호박방을 일반인들도 즐기며 로마노프 왕조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카메론 갤러리에서 바라 본 예카테리나 궁전
왕조의 유산을 즐기며 누리는 시민들

로마노프 왕조의 전성기를 누리던 황제들과 귀족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후손들에 의하여 온전히 보존, 관리되고 있다. 절대왕정이 누리던 사치와 향락도, 그 아래 억압받던 백성들의 고난과 눈물도 모두 흘러간 역사가 되었다. 지나간 역사의 뛰어난 유산들을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은 때로는 놀라움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푸시킨의 시처럼, 눈물과 땀으로 이뤄낸 로마노프 왕조의 유산은 후손들로 하여금 기쁨의 날을 맞이하게 해 주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복원된 황제의 마을은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유튜브 동영상으로도 감상해 보세요.

https://youtu.be/BoPL1mLd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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