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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Sep 09. 2021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동명 작품 해설입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Не ждали), 1884~1888, 일리야 레핀(1844~1930), 트레차코프 미술관, 캔버스에 유채

일리야 레핀은 독특한 이력의 화가죠. 19세기 러시아는 지식인들 중심으로 혁명사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레핀은 진보적 화가 집단인 '이동파'에 가담하여 그림을 통한 민중 계몽활동을 하죠. 그와 동시에 러시아적인 것의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아브람쩨보 동아리에서도 활동합니다. 레핀은 진보와 보수를 왔다 갔다 하며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황실에서도 좋아했던 화가입니다.

일리야 레핀(1844~1930) 초상화
이동파 화가들, 오른쪽 아래에서 두번째가 레핀

레핀은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는 '레핀 예술아카데미로'로 불리고 있을 정도에요. 그는 볼가강의 배끌이꾼들 1873, 사드코 1876, 쿠르스크현의 십자가 행렬 1883, 자포로지에의 코사크인들 1891, 1901년 국가평의회 기념 회의 1903, 이반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의 1581년 1885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이번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소개하려고 해요. 이 그림은 진보와 보수 어느 쪽에 속할까요? 혁명가의 뜻하지 않은 귀환을 주제로 그린 매우 강렬한 그림인데요. 그림을 통해 혁명에 대한 레핀의 생각을 읽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터키 술탄에게 탑장을 쓰는 자포로지에의 코사크인들, 1891, 레핀

허름한 옷에 눈은 퀭하고 삐쩍 마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베리아 유형에서 뜻밖에 풀려난 정치범이 집으로 들어서는 장면입니다. 그의 귀환을 기대하지 못했던 가족들은 당황한 듯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네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와 책상에 앉아 있는 아들은 매우 기뻐하고 있어요. 딸 아이는 남자를 경계하듯 쳐다 보는데, 아마도 이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문간의 하녀와 동네 아낙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군요. 그림 전면에 위치한 노파는 웅크리고 있다가 의자를 밀치며 급히 일어나는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의 어머니입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 레핀, 트레차코프 미술관

이 남자는 인민의 의지당 당원이었습니다. 인민의 의지당은 테러를 통해 러시아 전제정을 무너뜨리고자 시도한 단체로 유명하죠. 결국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를 폭탄 테러로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혁명은 성공하지 못하죠. 신의 대리자와 같은 짜르를 암살한 것은 오히려 인민의 반감을 샀고, 대대적인 검거 열풍 끝에 인민의 의지당은 1882년 와해됩니다. 아마도 이 남자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1881년 폭탄테러로 사망한 알렉사드르 2세의 임종 사진

많은 작은 소품들은 그림에 장르화적 성격을 부여 합니다. 그림의 주제와 달리 일상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캔버스 오른 쪽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인테리어 상세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책상 아래 발을 꼬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당시 전형적인 인텔리겐챠 가정의 가구들 모두가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 줍니다. 거실은 피아노, 지도 그리고 액자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 가족의 교육 수준과 정치 성향을 가늠케 하는 요소들입니다. 이 초상화들은 민주주의 소설가 니꼴라이 네크라소프(1821~1877)와 타라스 셰프첸코(1814~1861), 인민의 의지당에 의해 살해된 알렉산드르 2세의 장례 초상화와 고난과 대속의 상징인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들은 인민의 의지당 혁명가들의 사명과 관련있는 것들이지요. 네크라소프의 시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 인용되어 한국에서도 유명해 졌습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신문열람실, 네크라소프


네크라소프는 농노제 하에 괴로운 삶을 사는 러시아 농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러시아 사회를 풍자한 네크라소프의 시는 러시아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타라스 셰프첸코는 우크라이나의 농노 출신 화가이자 시인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반체제 인사로 몰려 유배를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하였습니다. 그림 골고다는 프랑스 화가 카를 쉬테이벤(1788~1856)의 작품입니다. 예수는 죄인들, 병자들, 귀신들린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종교-권력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은 알렉산드르 2세의 임종시의 사진으로 궁정 사진가 세르게이 레비쯔키(1819~1898)의 작품입니다.

니꼴라이 네크라소프(1821~1877)

고신영복 선생 문집 '처음처럼'에 나오는 '창문과 문'이라는 시를 잠깐 소개합니다.


창문과 문

창문보다는 문이 더 좋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현장으로 열리는

실천의 시작입니다.

출처, http://www.shinyoungbok.pe.kr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보면서 문득 신영복 선생 자신과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이 그림에도 2개의 문이 있군요. 따스한 햇살을 뿌려주는 창문과 어두운 모습의 혁명가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따스한 방안은 전형적인 인텔리겐쟈 집안의 분주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창문 너머의 풍경은 관조의 세계이며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문으로 나가는 공간은 싸움터이며 실천의 공간입니다. 아버지에게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는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하기에, 미래의 더 나은 행복을 이뤄주고 싶었기에, 혁명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가족은 불행한 가족사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죠. 그는 이 문으로 나가 싸웠고 싸움에 져 오랜 유형의 세월을 보내다 그 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풀려났을까요? 가족들이 뇌물을 바친다든지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혁명가가 돌아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겠죠? 단순 가담자로 판명되었거나, 혹 모범수로 인정받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사상 전향을 하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혁명가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깊이 파인 눈에서 묻어나는 결연함은 오랜 유형생활이 그의 진보적 신념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삶이 이 지점에서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창문과 문. 둘다 공간을 열어 주는 것이지만, 신영복 선생은 문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어떤 위대한 사상도 인간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레핀도 이 그림에서 그러한 점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창문과 문으로 해석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이 해설은 유튭 영상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ZsF8wDIBR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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