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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y 02. 2024

[職四] 비우고 채우고

직장인의 사계 - 봄 [내 삶을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한 비워냄]

  마음이 신산하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날이 있습니다. 일이 하기 싫어지고 마음속에 뭔가가 꿈틀대는,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 왜 그런 날 있잖아요. 나도 내 맘 모르겠는.


  그럴 때 저는 주변 정리를 시작합니다. 




  우선 널려 있는 서류들을 모아 세 절을 시작합니다. 많을 때는 10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뭔 놈의 보지도 않을 문서를 이렇게 모아 놓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중에 봐야지라고 두었던 그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제정신이 왜 그리 신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책상 위의 문서들처럼 제 머릿속도 너저분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덜그럭 거리며 종이를 먹어 치우는 세절기를 보고 있노라면 꾸역꾸역 보고서를 생산해 낸 저의 노동력의 산물이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시리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시원한 감정이 훨씬 큽니다. 


  그리고 나선 애꿎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물티슈로 박박 닦아 줍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물티슈 꺼낸 김에 책상 주변의 묵은 먼지도 꼼꼼히 닦아 냅니다. 창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반갑기는 하지만, 때로는 숨을 쉬지 말아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놀라움을 주기도 합니다. 실내를 비추는 그 광선을 통해 바라본 공기에는 온갖 먼지가 너무도 많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숨을 쉬면 몸이 아파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 정도로 정말 많은 부유하는 먼지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먼지들이, 모두들 퇴근한 그 정적을 틈타 고스란히 가라앉아 책상에 켜켜이 나이테처럼 먼지테를 드리워 놨습니다. 보기만 해도 목이 간질 거리네요. 

  마음속 먼지를 닦아내듯 그렇게 일하는 공간의 주변을 구석구석 닦아내 보세요. 마음도 조금은 맑아질 거예요. 


  이제 서랍입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네요. 도무지 뭐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까지 그득그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다 끄집어냅니다. 정리를 위해선 이 정도의 혼란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싹 다 갈아엎는다는 생각으로 온갖 잡동사니를 책상 위에 널어놓습니다. 이제부터 과감해져야 합니다. 큰 봉지를 옆에다 두고 아쉬운 친구들과 헤어질 시간입니다. 회자정리라고 했던가요.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짐이 있어야 또 만남이 있는 것이 삶의 이치이니 보내 드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쓸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바로 헤어집니다. 최근 3개월간 쓰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정 버리기 아깝다면 공용 문구함으로 이동시켜 당장 필요한 분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보내 줍니다. 


  서랍 정리까지 끝내면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다음은 가방입니다. 가방도 물론 뒤집어 까야 됩니다. 도무지 내가 왜 이걸 넣어 뒀지 하는 친구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이쯤 되면 낯이 뜨거워집니다. 왜 내 가방에 이렇게 많은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가방도 비워 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담기 위한 공간으로 재창조합니다. 가방을 비워내면 가방의 축소판인 지갑을 한 번 꺼내 봅니다. 자주 쓰지 않는 온갖 카드들과 언제 받았는지도 아련한 명함들, 꼭 필요할 거라 생각하며 받아둔 영수증까지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친구들과 인사합니다. 잘 가시라고. 그렇게 제게 덕지덕지 붙은 삶의 찌꺼기들을 씻어 냅니다. 


  어느덧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물건 찾기도 수월해졌고 말끔한 책상만 봐도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부모님과 같이 살던 시절에 이여사님이 가끔씩 쿵쾅거리며 부엌을 뒤집으셨을 때 '저분이 오늘은 또 왜 저러시나' 했었는데 이제 100% 공감이 갑니다. 이여사님 나름의 심란한 마음 정리법이었던 겁니다. 잡동사니를 비워냄으로써 마음속 잡것들을 모두 내다 버리는 마음 청소 행위였던 거지요. 이제야 드디어 봄을 맞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비워내야 무언가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은 조금 덜어내고 내가 좋아하는 걸 조금 담아 보는 건 어떨까요. 내 삶에, 의미 있는 작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나가다 보면 삶 자체가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5월의 첫 근무일인 오늘, 과연 어떤 좋아하는 것을 담아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미리 예정된 일정 중에 찾을 수도 있고 엉뚱한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 도 있겠네요. 생각났습니다. 선선한 봄기운에 취해 뱃속에 온통 봄기운이라도 담아 봐야겠습니다. 


  상상해 봅니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히죽거리며 산책을 하는 거예요. 남의 시선은 뭐 죽어서나 신경 쓰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좋잖아요. 잡동사니들을 치워서 마음도 맑아졌고, 봄기운도 완연하니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의 감촉도 좋고, 그냥 오늘은 그렇게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좋은 날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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