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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r 18. 2024

[職變] 19년 차 직장인의 우울증 탈출기

직장생활의 변곡점 - 23년의 기록 (19년 묵은 직장인)

지금 여기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현재 


  직장인의 사계와 더불어 제 직장생활이 급선회를 했던 지점을 통해 제가 배운 것들을 '직장생활의 변곡점'이라는 테마로 풀어 보려 합니다. 제겐 그저 지나간 한 때겠지만, 누군가  이제 막 그때를 지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필경 도움이 되리라는 맘으로 어두운 기억을 꺼내 봅니다. 오늘은 제게 또 우울한 마음이 찾아와 힘들었던 작년을 끄집어내어 탈탈 털고 햇볕에 널어 말려 보려 합니다. 다소 과격하지만 니체의 말로 글을 열어 보겠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17년에서 21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복귀하여 22년부터 본사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필드와는 거리가 있는 신사업 개발을 담당하였던 지라 약간은 한직이면서도 회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나름 나쁘지 않은 보직에서 1년간 속된 말로 팽팽 놀았습니다. 전국 팔도 출장 다니면서 업체 방문도 하고 방문길에 토속 음식도 먹으면서 괜찮은 한 때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에는 늘 업다운이 있게 마련이지요.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것처럼 많이 여유로우면 많은 일들이 몰아닥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시작됩니다. 


  22년 가을 즈음 모시던 윗분으로부터 필드 팀장 자리로 가라는 지침을 받았습니다. 한 사업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팀장이다 보니 온갖 잡일도 많고 힘든 자리였으나 니체의 '운명애'를 철석같은 신조로 가지고 살았던 저는 또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릴지 기대반 설렘반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엄청 큰 착각이었지만 말이죠. 그렇게 새로운 부서로 옮겨 갔습니다. 옮기기 전에 개략적인 사업부의 현황 및 숫자도 들여다 보고 직원들 인터뷰도 해서 나름의 개선 방안도 고민했고 보고도 마쳤기에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배정받은 사업부는 회사 내 사업부에서 유일하게 적자를 내고 있던 지라 저의 보고서 내용은 대부분 합리화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기존에 잘못되어 있는 구조나 관행들을 고쳐 손익을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시작의 순간부터 이미 저는 큰 착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선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부서에서 이미 자리를 차고앉은 누군가에게는 저란 존재가, 특히나 제가 가진 이런 생각이 충분히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이상적이었던, 온갖 자기 계발서의 후광이 남아 세상이 밝은 것으로 가득 차 보이던 그때의 저는, '맑은 눈의 광인'처럼 저는 사업부에 와서 해맑게 다음과 같은 류의 얘기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 현재 사업부의 손익 상황이 좋지 않으니 다 같이 노력해서 개선을 해 보자라고요. 이런 맘으로 기존에 한 자리씩 하고 있는 '기득권' 팀장들에게 접근했습니다. 기득권! 그렇습니다. 이미 권리를 가진 이들에게 앞으로 당신들의 권리를 제한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여하튼 1년 전의 일이지만 그 시절의 저는 참으로 무식하고 멍청했던 것 같네요. 


  당연히 반응들은 시큰둥했지요. 그들의 반응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세 단계였습니다. 우선 '너는 뭔데?'라는 반응이 오고, 그다음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가 날아왔고, 마지막으로 '몰라,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가 삼단 콤보로 날아왔습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저는 그렇게 세 대의 펀치를 맞고 잠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직속상관인 사업부장님도 급격한 변화에 거부감이 많은 분이었던 지라 그저 멀찍이서 저의 하는 꼴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회사의 윗분들이 보낸 쁘락지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 시절의 저는 그야말로  '섬'이었습니다. 저를 탐탁지 않게 보는 여러 이들에게 둘러 싸인 섬이었지요. 여기저기 따가운 눈빛으로 린치를 당하기도 하고, 팀장 회의 시간에는 언성을 높여 저를 윽박지르기도 했었습니다. 저도 참 바보 같은 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적당히 했으면 되는데, 이 놈의 더러운 성격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런 놈입니다. 안 했으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건 제가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기존 수구세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여론도 제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이 외로웠습니다. 분명 회사를 위하고, 사업부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적자 나는 사업부라 손가락질받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냐라고 설득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은 생각보다 더 견고했습니다. 커다란 성 앞에 조랑말 탄 기사가 서 있는 약간은 코믹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기사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습니다. 사업부 내에서, 특히 기존에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앉아있던 주요 팀장들에게 저는 눈엣 가시였겠지요. 그러다 보니 은근한 따돌림도 있었고, 대놓고 팀원들과 함께 새로운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었습니다. 다행인 건 일부 양보하기는 했지만 회사의 중추부서인, 힘의 논리로도 더 상위에 있는 '기획팀'을 등에 업은 제게 끝까지 저항할 수는 없었고 큰 틀에서는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힘들게 하드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있던 팀장과 인원조정 관련 언쟁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저항은 더 거셌고 저는 갑자기 숨쉬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저는 무거운 맘으로 발길을 옮겨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이유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한 발작씩 떼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 앞이었습니다. 작년 봄쯤이니 아직은 날이 풀리지 않아 선선한 지금 이맘때쯤의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무작정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한 권(정확히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들'로 기억합니다) 빼들고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 2시간 동안 그저 책에 눈과 마음을 두었습니다. 내용과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면서 '이게 뭐 하는 건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랬나 싶을 정도의 일이지만(이후에 더 큰 사건이 많이 터져서 그런가 봅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까지 배척당한다는 것이,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이 제겐 너무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넉넉한 엄마의 치마폭에 가려 앞을 잘 볼 수 없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상태의 저에겐 너무나도 버티기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보며 눈물을 흘렸더니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멍하니 길을 나섰습니다. 그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무시로 흘린 눈물 덕에 눈은 촉촉하였고, 세상은 온통 반짝이는 것 같았습니다. 차들의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 같기도 했고, 몸 전체는 땅속으로 푹 꺼진 듯한 그저 아득하기만 한 그런 기분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앞으로 한 발 내미는 그런 채로 그렇게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떤 다리를 지나가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문득 또 눈물이 터졌습니다.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설움과 슬픔, 막막한 마음이 뭔가를 밀어 올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슴 깊이에서 밀려 나온 그 덩어리는 먼저 목을 메이게 했고 코를 시큰 거리게 만들고는 이네 눈물까지 올라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정말 꺼이꺼이,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쳐다보니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나름 강한 자아를 가졌다고 생각했고, '마음공부'라는 시간을 통해 철학적으로도 무장하고 내면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던 제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원래도 '죽음'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기존에는 그저 호기심 반, 삶을 더 사랑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공부 반 정도였는데 이제 제가 맞이한 '죽음'은 생을 바로 마칠 수 있는 '자살'이라는 얼굴을 한 제 코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현실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부정적인 생각들로 얼룩졌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러한 그로기 상태에 있던 제게 더 이상의 펀치가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 몇 대만 더 맞았다면 저는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힘든 고충을 이해하고 옆에서 묵묵히 저를 돕던 팀원 박 과장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냉정하리 만큼 합리적인 그 친구가 했던 말 한마디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늘 제가 외쳤던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달게 받겠다라던 마음속의 소리를 박 과장이 제게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일부러 점심도 거르고 햇볕을 맞으며 걸었습니다. 다 지나갈 일에 목숨까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더 악착같이,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런 자기 극복과정은 제게 기존 세력의 저항도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제게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한 뼘 더 자라났습니다. 그즈음에 늘 마음속에 참가하고 싶었던 '꿈벗 세미나'를 통해 제 자신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밀도 높은 시간을 가짐으로써 제 마음은 좀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저는 어두움의 그림장에서 벗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 추스르기인 것 같습니다. 너무도 어렵지요 버겁고 힘듭니다만 조금은 내려놓고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관조하는 것이 제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볕 좋은 날 많이 걷고, 책 속으로 다이빙하기도 하는 여유를 제게 조금 줬던 것들이 그래도 위험한 생각을 하는 걸 조금 지연시켰던 것 같네요. 그리고 제게 박 과장이 제 안의 답을 끌어내 줬듯이 그렇게 너무 가깝지 않은 이들과 편안히 얘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은 가벼운 어조로 말이지요. 그리고 최근 교육을 받으면서 저보다 훨씬 심한 우울증을 겪은 간호사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본인의 상황이 심각할 경우 꼭 의학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시더라구요. 자신을 잃는 것보다는 모두들 꺼려하긴 하지만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이 훨씬 낫다구요. 생각보다 주변에 이런 종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힘들면 참고하려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누구에게 건 좋은 에너지를 주고 싶어 졌습니다. 원래 사람은 가까운 이들이 온갖 생채기를 내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이에게 위로를 받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낯선 이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큰 위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여행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절친에게도 하지 못한 속 얘기를 편하게 털어놓고 그 시간을 통해 자기 치유를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이런 익명성에 기댄 바라지 않는 마음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즈음의 저는 평범한 대화 속에서 '그래도 괜찮아'라는 나름의 온기를 전해보려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모두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세상에 분명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자신의 가치를 함부로 낮출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나를 업신여겨도 나만은 나를 붙들고 있어야 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우울하던 시절 그 에너지가 주위를 어둡게 했겠지요. 그래서 이제 저는 춥고 어두운 에너지보다 따뜻하고 밝은 기운을, 어린 시절 아랫목에서 늘 받았던 모든 걸 다 녹여낼 것 같은 따스한 온기를 퍼뜨리려 합니다. 나의 미약한 온기라도 누군가의 상처받은 마음을 녹일 충분한 에너지가 되리라 믿기에 용기 내어 온기를 나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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