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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r 19. 2024

[職變] 월급쟁이 되기도 쉽지 않네

직장생활의 변곡점 - 첫 번째, 두 번째 직장의 짧은 추억

지금 여기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현재  


  2004년 처음 직장생활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졸업을 하고 원서를 내고 바쁜 시간을 2003년 가을과 겨울에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취직의 필수 코스였던 적성검사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면접도 보고 일부 회사에서는 논술실력까지 평가를 받아야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견 해운회사에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냉큼 입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즈음의 저는 '바다', 즉 넓은 세상을 무대로 하는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있었던 것 같네요. 여하튼 그렇게 첫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일주일 정도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인사팀장님이 면담을 요청하셨지요. 입사 신체검사에서 폐결핵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있으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고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제 막 친해지려 하던 입사 동기들을 뒤로한 채 저는 바로 입원을 하여 약 한 달간의 집중 치료를 받았습니다. 입사 결격사유인 전염력이 있는 병에 걸렸으니 당연히 퇴사처리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원증 하나 받지 못하고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 인사팀장님의 통보를 받고 큰 병원으로 이동하던 그 길이 눈에 선합니다. 한낮의 분주한 종로 거리의 어수선함 속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유리벽에 갇혀 격리된 듯한 막막함으로, 억울함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지나고 보니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직장생활을 회사에 제출한 서류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마치게 되었네요.


  1년여의 약물 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여 열심히 치료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현명한 배려로 아침에는 수영하고, 점심에는 중국어도 배우는 배부른 한량의 삶을 살았습니다. 단백질이 몸에 좋다고 하여 일주일에 서너 번은 동네 정육점에서 특별히 공수해 주신 토시살을 맘껏 먹곤 했으니 참으로 좋은 팔자였지요. 그럼에도 늘 가슴 한켠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제 폐에 새겨진 결핵의 흔적처럼 제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습니다. 아물기는 했으나 비가 오기라도 하면 간지러워지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좀 지나 병원에서도 감염력이 없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는 소견서를 받았기에 다시 구직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구직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던 지라 졸업 후의 제 공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대형 해운회사에 최종면접까지 합격을 하였습니다. 면접 때 했던 답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봤던 면접 중에 가장 기분 좋게, 이번에는 면접을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해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나 봅니다. 면접 질문이 '호주 멜버른과 인도 뭄바이 중에서 근무지를 택하라면 어느 도시를 택하겠느냐'였습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지사가 있는 해운회사의 특성상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총 4명이 함께 면접을 봤는데 첫 번째 친구는 호주 멜버른이라고 답했습니다. 세계의 3대 미항이고 기후도 좋고 해서 근무하고 싶다고 아주 솔직한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두 번째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 대답이 아주 그럴싸합니다. '저는 인도 뭄바이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물류는 현재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도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인도 뭄바이에서 재 능력을 맘껏 펼쳐 보고 싶습니다'라는 준비하지 않았으나 뼛속에 새겨진 반골스러움으로 대답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저도 가끔씩 면접관으로서 면접을 들어가지만 이 정도의 대답을 하는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그린라이트가 켜집니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겠다, 한 번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는 머슴을 누가 반기지 않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딱 맞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님이 왜 돌쇠만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대부분 생각하는 통속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첫째, 돌쇠는 장작을 다 팼다고 해서 드러누워 쉬지 않습니다. 도끼 날도 갈아 놓고, 자루는 멀쩡한 지 늘 준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둘째, 돌쇠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돌쇠가 있다는 신념으로 늘 해결사를 자처합니다. 마지막으로, 돌쇠는 마음이 따뜻합니다. 주변에 늘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된장찌개 같은 성격입니다. 저는 제가 바로 그 돌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귀사에서 돌쇠가 활동할 할 수 있는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역시나 지금 입장을 바꿔 봐도 워딩이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첫 면접을 가는 버스에서 저 생각을 하고 멘트를 다듬은 후에 모든 회사 면접에서 사용했던 자기소개였습니다. 대충 생각해도 10여 차례 이상 면접을 봤으니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렇게 훌륭하게 면접을 마쳤고, 임원진 면접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물론 결과는 예상대로 합격이었습니다. 면접도 잘 봤겠다, 좋은 인상도 윗분들께 드렸겠다,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 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봅니다. 회사는 건강한 머슴을 원하는 곳입니다. 저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법적으로도 저를 고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물며 회사 사정으로 입사를 취소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오리엔테이션도 가지 못하고 전화 한 통화와 함께 두 번째 회사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제 두 번째라고 하기도 애매한 직장생활을 마쳤습니다.


  반년 정도 지나 이제는 정말 완치가 되었습니다. 취직에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지원한 중견 해운회사에 다시 합격하였습니다. 또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제 면접을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합격을 했다는 것과 같이 입사한 동기가 8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모두 저와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나온 평범한 사람들임을 발견하고는 편한 맘으로 선배들 따라다니며 술도 먹고 노래도 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물론 낮에는 때로는 엑셀과 때로는 해외 에이전트와 씨름하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업계 특성상 낮술도 잦았고 밤술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여러 분들과 자리를 많이 했습니다. 눈먼 돈이 많았는지 사원인 저에게도 활동비를 나눠 줄 정도로 살림이 풍족했습니다. 일도 적성에 맞았고, 술도 마다하지 않던 제게는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술에 젖어 일에 치여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흘러갔습니다. 회사에서 야구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각 팀의 선배 분들과도 나름 관계를 잘 맺어 놓아 직장생활은 물 흐르듯 원활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회사가 뒤숭숭해집니다. 


  회사의 경영권이 재계순위 30위권의, 당시만 해도 문어발 확장으로 시끄럽던 그룹으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선배들은 삼삼오오 모여 낮술을 자주 하고, 팀장님도 자주 출타를 하십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소위 점령군이라는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재무, 인사, 영업 주요 자리에 새로운 분들이 앉기 시작했습니다. 팀장님과 선배분들의 움직임이 더 분주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원 전체가 낮술을 하던 그 점심시간에 팀장님께서 회사를 떠나시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배 중 대부분이 함께 옮기는 조건으로 규모는 지금보다 좀 작지만 유사한 일을 하는 해운회사로 가신다고 하시더라구요. 제게도 사수였던 대리님이 같이 가자고 하셔서 당장 거절은 못했으나 뭔가 찜찜함을 한켠에 둔 채 그 자리를 물러 났습니다. 대략 한 달 정도 있다 옮길 예정이라는 둥 여러 가지 준비들을 하고 계셨습니다만 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당한 일인지라 그저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철 안 든 막내까지 데리고 가시려고 애쓰셨을 팀장님이나 선배님들께 정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런 어수서한 날들을 보내다 동기들과 기왕지사 이리된 거 야구장이나 함 가자고 제가 선동을 했습니다. 가장 잘하는 일이 술판, 놀자판 벌리는 것이었으니 미묘한 분위기를 잘 파악한 저의 선동은 전원참석이라는 쾌거를 이루며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도 이런 저희에게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4시쯤 일찌감치 호사를 나섰습니다. 술과 안주를 그득그득 가방에 담고 우리는 야구장으로 갔습니다. 모두들 채 3회가 끝나기 전에 만취상태가 되었고 그렇게 정신없이 고성방가를 하고 있을 때 그 시끄러운 곳에서, 그 술 취한 상태에서 제 전화가 울린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받지 않을 전화를, 그것도 대학 동기가 한 뜬금없는 전화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삶은 또 제게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왔나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우여곡절이 많기는 했었네요. 그래서 삶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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