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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r 21. 2024

[職變] 알다가도 모를 이놈의 직장생활

직장생활의 변곡점 - 본격적으로 시작한 직장생활

지금 여기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현재  


  어렵게 시작한 첫 직장이 공중분해 되는 사건을 겪고 있는 과정이었는데 또 다른 페이지가 열리고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학동기의 전화를 그냥 받았습니다. 


보통은 그 상황에서 못 받거나 나중에 전화해야지 하고 잊곤 하는 그런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운명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여러 공부를 통해 결국 인간의 삶은 깨닫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전화를 받은 건 이상한 노릇입니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나서는 대뜸 제게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 원서를 쓸 생각이 없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신입사원들에게 지인을 추천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연락을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게 전화하기에 앞서 두 친구에게 먼저 했는데 다들 지원의사가 없어 저에게 순서가 돌아온 거였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세 번째 리스트에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오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원 마감기한을 물었더니 내일 오전에는 원서가 와야 한다고 하네요. 술 먹은 기세에 그러마 대답하고 다시 열심히 붓고 마시고 몸속 깊이 박혀있던 화를 분출하고 나서는 지독한 숙취에 새벽에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치 영화에서 정신이 맑아지는 장면처럼 이상하게 정신이 맑았습니다. 숙면을 취하고 기상한 쨍한 느낌이었습니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는 주섬주섬 컴퓨터를 뒤져 입사지원서를 편집합니다. 회사명만 바꾸고 대충 정리해서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했습니다. 마감시간이 촉박하여 급하게 차를 몰고 대학 동기가 얘기한 장소로 갔습니다. 로비에 기세 좋게 차를 대고 기다리는데 경비 분들이 다급히 뛰어 오셔서 여기에 차를 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네요. 지금 지인이 내려오고 있으니 5분 있다 빼겠다고 호기롭게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그럼 저 옆으로 이동주차라도 하라며 빨리 빼라고 하시네요. 몇 미터 옮겨 놓고 나니 친구가 내려왔습니다. 이 친구는 아까 그분들 보다 더 큰 소리로 뭐라 합니다. '이 정신 나간 놈아 회장님 차 대시는 자리에 주차를 하면 어쩌냐'라며 난리를 치는 모습에 멋쩍어져서 서류만 던지고 얼른 몸을 피했습니다. 맞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도열해 있고 검은 세단이 들어와야 하는 자리에 제가 하얗다 못해 빈약해 보이는 소형차를 떡 하니 주차했던 겁니다.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도 거창한 일을 제가 해내고야 말았던 거이죠. 피 끓는 청춘이자 도무지 철이라고는 들지 않는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젊으니까'라고 다 넘겨 버리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설 익어서 먹기도 그렇고 버리자니 아까운 그런 아쉬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계산 능력이 부족했기에 무언가에 온 맘을 던지기도 하고, 온몸을 던지기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아련하고 아쉬운 시간들입니다.


  자 그럼 새로운 직장생활의 서막을 리뷰해 보겠습니다.


  지인추천이니 당연히 서류는 합격이었고, 1차 면접도 꾸역꾸역 통과하였습니다. 이미 회사 생활을 1년 반정도 하였기에 뺀질뺀질 대답은 잘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2차 임원면접이었습니다. 본성을 숨기고 착한 척하며 조신하게 대답하고 있던 그 찰나에, 인상이 고약해 보이는 당시 인사팀장이셨던 상무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상무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나름 회사에서 라인을 잡고 힘깨나 쓰시던 분이셨더라구요. "토익 성적이 상당히 좋은데 그럼 영어를 잘하겠네요?"라고 물으셨지요. 당시 토익점수가 935점이었으니 낮은 점수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사실 문과생들은 어느 정도 열심히 공부하면 그 정도 점수는 받던 시절이기에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유행하던 종로의 스타강사 강의의 도움을 받았더니 시험 보는 요령을 콕콕 찝어서 족집게로 알려줘서 무식하게 혼자 공부할 때 보다 100점 가까이 오르는 쾌거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토익이라는 시험이 과연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건지, 아니면 배운 기술과 지식을 적절히 섞어 잘 버부리는 속된 능력을 평가하는 건지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사설이 길었습니다. 토익 잘 봤으니 영어 잘하겠네라는 질문에 이 정신 나간 놈의 대답이 아주 눈꼴사납기가 그지없고, 거의 정신 나간 수준이었지요. 제가 생각건대 그 당시 거의 매일을 술로 보냈고 면접 전날도 술을 잔뜩 먹었으니 숙취와 금단증상으로 짜증이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흐트러진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도 흐트러졌던 것 같습니다. 제 대답이 가관입니다. "사실 토익 성적과 영어 실력은 크게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과생들이면 조금만 공부해도 이 정도 점수는 다 받습니다"였습니다. 그 임원분은 욕을 하고 싶지만 욕은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어지시는 정도였지만, 주변에 같이 면접을 들어갔던 분들의 경악하는 모습이 저는 더 기억에 뚜렷하네요. 여하튼 이렇게 잘 말아먹었습니다. 면접은 잘 말아먹었은 김에 쏘맥도 맛있게 말아먹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저를 소개해준 친구한테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입사 준비를 하라는데 저는 도무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물론 신체검사라는 마지막 관문이 있었지만, 이미 다른 회사를 다녔던 경력이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통과하였고 그렇게 재계순위 10위 안에 있는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하였습니다. 


  입사는 확정이 되었고,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님들, 인사팀 분들과의 저녁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운 좋게도 제게 토익 관련 질문을 하셨던 인사팀장님 근처에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편한 맘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그분께서 날 선 한 마디를 제게 날리셨습니다. "야, 너는 젊은 애가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해운회사 같은 데를 다닐 생각을 했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며 직격을 하시더라고요. 지금이야 꼬장꼬장한 노인네 잘 못 건드려서 혼쭐나는 모양이구나 하고 미소를 짓겠지만 그 당시에는 뜨끔했습니다. 역시 이 놈의 혓바닥은 함루로 놀리는 게 아닌데 어설프게 건방 떨다 혼쭐이 났습니다. 그분의 기습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점심식사 하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분이 타셨습니다. 대략 2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탑승한 엘리베이터에서 또 불쑥, "야, 너는 원래 내가 절대 뽑지 않으려고 했는데, 꼭 뽑겠다는 임원이 있어 뽑혔으니 행동거지 조심해라"라는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남들 눈을 많이 신경 쓰는 저는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인사팀장님은 부장, 사원 가릴 것 없이 "야, 너, 임마"를 기본 호칭으로 쓰시며 남을 깔아뭉갬으로써 모든 직원들이 건방을 떨지 않고 '겸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아주 좋은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겁도 없이 입사도 못한 놈이 대들었으니 얼마나 미웠을까요. 충분히 이해됩니다. 진짜로 제가 먼저 큰 결례를 범했으니 그 정도의 꾸중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를 채용해 주신 분은 입사한 부서의 사업부장님이셨습니다. 사람 좋고 평상시에는 고집을 강하게 세우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이상하게도 저를 픽해주셨더라구요. 이유는 묻지 못했습니다. 하늘 같은 사업부장님께 말단 사원이 그런 걸 물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언뜻 술자리에서 말씀하시길 '나랑 달리 똘끼가 있는 것 같아 꼭 데려오고 싶었다'라는 말씀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6년여를 좋은 팀장님 선배님들과 함께 나름 실적도 상위권이고 고과도 잘 받는 일 좀 하는 직원으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를 뽑아주신 사업부장님이 먼저 떠나시고, 믿고 따르던, 정말 제 직장생활의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주신 팀장님께서 떠나셨습니다. 이 분은 따로 한 편의 글을 써야 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무한신뢰와 세세한 가르침을 같이 주셨기에 철없는 저를 '성질은 드러워도 일은 잘하는 놈'으로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요새 하는 말로 '동기부여'의 달인이셨습니다. 그분이 가시고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는데 기존 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분이셨습니다. 예전 팀장님은 사원의 철이 덜 든 결재서류에도 큰 지적 안 하시고 너니까 사인한다'하시며 척 하고 결재도 해주시는 대인배셨습니다. 팀빌딩에도 늘 신경 쓰셔서 같이 낚시를 가기도 하고 등산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런 문화가 별로 이상하지 않았지요. 정말 가족 같은 팀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던 제게 '어디 대리 나부랭이가 의견을 내냐'라고 화를 내는 분이 오셨으니 제 직장생활이 순탄할 리 없겠지요. 또 그렇게 삶은 저를 시험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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