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등대지기 Mar 25. 2024

[職四] 그와의 이별

직장인의 사계 - 겨울

  며칠 전 저희 사업부 수출팀장이 갑작스레 제게 잠시 회의실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보통 이런 일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지요. 현재 제가 사업부 인사 관련하여 인사팀과 소통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팀원들 중 누군가가 퇴사를 하는구나 정도로 여기며 회의실로 향했습니다. 조직과 맞지 않아 떠나는 후배들이 종종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 반, 새로 사람 구할 걱정 반으로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았습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 좋은 일이에요?'라고 묻는 제게 그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나 그만둬'

.........................


정말 저 마침표의 길이만큼 긴 정적이 흘렀습니다. 막역한 사이까지는 아니었지만 같은 해 입사를 했고, 같은 팀에서도 4년 가까이 근무를 했으며, 현재는 같은 사업부에서 각자 팀을 맡아 역할을 해오고 있었기에 남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잠시 멍해져 있던 저에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말했습니다. 


'작년부터 일도 힘들었고, 팀원도 자꾸 줄고, 매출도 줄어드는데 맘고생이 심했어'


그렇습니다. 그의 부서는 매출 규모도 지속적으로 작아지고,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비단 그 팀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조금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늘 실적은 계획비, 전년비 미달하는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판매한 제품의 클레임 이슈로 인해 거의 반년 가까이를 소모적인 일로 고생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매출이니 이익이니 하는 숫자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는 사람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수출 관련해서 저 정도로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그리고 수출에 불리한 아이템을 가지고도 본인이 직접 맨땅에 헤딩 해가면서 고객사들을 관리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을 해 왔던 터라 더 오래 같이 하지 못하는 것에 맘이 아팠습니다. 


  인사팀에 사직을 의사를 알리러 다녀온 그가 허탈해하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말이라도 그만두지 말라고 잡을 줄 알았더니 너무 쉽게 받아주네'라며 허탈해하는 그에게서 웃음을 덧칠한 아픔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서운함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들을 떠날 정도로 그를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정말 그에게 서운하게 한 것이 없었을까라는 반성을 잠시 해 봅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를 알기에 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전통적인 인사 시즌인 연말에는 명퇴다 전출이다 해서 다들 술렁이는 분위기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준비 없이 맞는 이별은 언제나 씁쓸한 뒷맛을 길게 남기기 마련입니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세간에 널리 읽힌 이후에 많은 젊은 이들이 자살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전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거나 유명한 사람의 죽음, 특히 자살에 관한 소식에 심리적으로 동조하여 이를 모방한 자살 시도가 잇따르는 사회 현상을 이릅니다. 그래서 모방 자살효과라고도 하지요. 


  애써 눌러 놓았던 제 우울한 감정이 한껏 치솟았습니다. 작년 한 해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 나름 강한 자아를 가졌던 저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극도의 우울감에 시달렸었습니다. 여러 상황이 바뀌어 다행히 그 수준이 낮아지긴 했지만 요즘도 이따금씩 길을 걷다가도,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다가도 눈물이 흐르곤 하니 완전히 나아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와 한 잔 진하게 나눴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쐬한 소주를 온몸으로 마셔댔습니다. 40이 넘으면서 어느 날인가부터 소주맛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잔 털어 넣는 그 행위 자체에서 달달한 위로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잔을 따르고 천천히 들고 입술을 축이고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렇게 우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밤을 함께 밝혔습니다. 


  떠나간 직장동료와 자주 만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도 그의 삶이 있고 내게도 살아내야 할 직장에서의 내 삶이 있으니까요. 어쩌다 볼 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못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아쉬웠습니다. 떠나는 그를 보며 아쉬웠고, 남은 내 모습에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그런 느낌이 있어 씁쓸했습니다. 저도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자의건 타의건 직장을 나셔야 되겠지요. 


그저 제가 떠날 때의 그 발걸음이 춤추듯 경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악착같이 제 자신을 벼려 봅니다. 매일 벼리다 보면 제 앞을 막고 있는 장막을 찢고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이제 그를 보내줄 시간입니다. 두 손을 꼭 맞잡고 어디서건 건강하자며 인사를 나눕니다. 50에 가까운 웃자라 버린 사나이 둘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합니다. 서로의 힘들었던 여정을 잘 알기에, 그 아픔들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맞잡은 손을 오래도록 놓지 못한 채 속으로 속으로 눈물을 삼켜 봅니다. 


 그의 앞날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래 봅니다.  있기를 빕니다. 

작가의 이전글 [職變] 알다가도 모를 이놈의 직장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