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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r 26. 2024

[職四] 때로는 똘스럽게

직장인의 사계 - 가끔은 귀여운 똘아이가 돼보고 합니다.

똘스럽다 :

자신이 가진 내면의 똘끼를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만천하에 꺼내놓는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

(등대지기 사전)


가끔은 그냥 맘 가는 대로 엉뚱한 짓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가끔 쓰는 막말 '똘스럽다'는 그렇게 직장생활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작년 한참 어려운 과정을 지나고 있을 때의 추억입니다. 사업부원들과 부딪히고 깨지면서 손익 개선을 위해 하드캐리를 하던 시절이었지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해졌던 그런 날의 기억을 좇아 봅니다. 


  열심히 살아가던 그 어느 날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임원께 불려 가 이런저런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듣다 보니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격려는 고사하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니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툭 하고 치면 쏴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마음 깊이 눌러 두었던 우울함의 어두운 얼굴도 슬그머니 나오는 것 같았고, 나름 애쓰는데 변하지 않는 상황과 전통을 고수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절망 아닌 절망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사춘기 소녀처럼 저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이끌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바꿔 우리 부문 전체의 모습을 나아지게 하고, 궁극적으로 수익을 내면서(거의 거의 10년 가까이 적자 상황이었습니다) 전체 조직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바꿔보자라는 저의 순진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입을 함봉하고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다는 태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했습니다. 그냥 다 싫었습니다. 상처받은 짐승의 모습처럼 잔뜩 웅크리고 굴 속에 들어앉아 모든 걸 다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팀 선임인 박 과장과 둘이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전날 과음했던 터라 김치찌개를 먹으면서도 줄곧 부정적인 말들을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 과장은 저와 맘이 통하는 친구였던 지라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힘든 시절을 견뎌낼 수 있게 도와준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 과장은 별도로 제가 한 꼭지를 만들어 그가 가진 매력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정말 불현듯 예전부터 어렴풋이 품어왔던 한 광경이 떠 올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포클레인을 몰며 집을 짓기 위한 터를 잡기도 하고 길을 내기도 하는 모습이네요. 제 모습을 들여다보니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떡 하니 굴삭기 운전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식사를 마치고는 근처 서점에 가서 덥석 굴착기 운전기능사 책을 데리고 왔습니다.


  왠지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꿈에 다가간 것 같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제 안의 똘끼는 또 고개를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똘끼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움직이지만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부리는 저의 정제된 똘스러움은 제게 늘 충만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삶에서 택한 이런 엉뚱한, 나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였으나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한 행동들이 나중에 작건 크건 하나의 변곡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제 짧은 삶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막연히 배우고 싶다고 취미로 시작했던 중국어로 6년여간 중국에서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었고, 생각 없이 제출했던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팀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삶이 다 우연에 의해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제가 보기엔 의도한 대로 다 되지 않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한 전혀 뜻하지 않은 어딘가로 무턱대고 끌어다 놓기도 하더군요. 다만 이 모든 변화에는 제 의도와는 다를 수 있으나 어떤 원인이 되는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행동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뭐라도 시도하고 도전하는 게 삶에는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굴착기입니다. 기분 좋게 보란 듯이 여기저기 굴착기 운전기능사 책을 자랑했습니다. 


  술이 깨고 문득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니 '버티기 힘드니 건들지 마시지요'라는 시위이기도 했던 것 같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나 이 정도 똘아이다'라는 짓궂은 장난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랜만에 꺼내 놓은 똘끼 카드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었던 것 같네요. 은근한 협박을 하시는 분도 있으시고, 친한 형처럼 힘내라며 묵묵히 격려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원들한테는 미안하더군요. 난데없이 굴착기 운전 자격증을 따겠다고 하고는 커다란 소음을 내며 사무공간을 정리하는 팀장을 보며 불안해하고 있음은 분명했습니다. 갑작스런 변동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는 점 인정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저를 보고 따라오는 팀원들을 생각하면 찬 바람이 부는 날의 엉뚱한 행동은 다소 과했다고 생각하며 반성합니다. 이 자리를 통해 팀원들에게 미안함을 표합니다. 쏘리.




  사실 저는 궁극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평정심을 가지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면서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에 감동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마음 하나 어찌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이들을 행동하게 할 수 있을까요. 본인은 떼쓰는 아이처럼 시위를 하면서 어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시원한 비바람이 불어오니 머리가 맑아집니다. 출근길에 온몸으로 맞이한 찬 바람이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 놓은 것 같습니다. 다시금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제 다시 정신줄 잡고 제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정신을 하나로 모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제 인생에 주어진 숙제를 끝낼 날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숙제 마치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날 '참 똘아이 짓 많이 하고 살았구나 ㅋㅋㅋ'할 수 있다면 제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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