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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y 08. 2024

[職四] 애플 본사에 삼성 노트북을?

직장인의 사계 - 겨울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실수]

  대략 2013년 정도의 일로 기억 합니다. 전자소재 관련하여 해외 영업 직무를 맡고 있던 시절의 일입니다.  낯 뜨거운 실수라 창피하지만 언젠가는 꼭 세상에 꺼내놓아,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제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공개해 봅니다. 


  그 당시 중국지역 담당을 하고 있던지라 중국에 출장을 정말 뻔질나게 다녔습니다. 주로 남쪽의 심천이나 동쪽의 상해지역으로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중국만 줄창 다니던 제가(중국행 관련 비행기만 120회 정도 탔으니 적진 않네요) 미국 출장을 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회사에는 사과모양의 로고로 유명한 바로 그 거대한 회사(예, 저희가 아는 애플입니다)와 비즈니스가 있었는데, 전임자가 다른 팀으로 가면서 그나마 팀에서 영어를 좀 하던 제게 그 일이 맡겨졌습니다. 저는 어학연수 등은 다녀오지 않았지만 나름 토익 935점이라는 점수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가 영어를 잘할 거라는 오해를 샀던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토익점수와 영어 회화 실력은 다소 간의 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몸속에 있던 영어 세포를 까 뒤집어 메일을 쓰고 컨퍼런스 콜을 하며 대응해 나갔습니다. 때로는 중국 현지에서 그들의 전화를 받아 대응을 하기도 하며 열심히 비즈니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애플 측에서 두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해서 저희 생산사이트도 같이 가고, 회사 소개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영어, 중국어, 한국어를 넘나드는 언어 대환장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애플의 중국계 엔지니어와는 중국어로 소통을 하기도 하며, 나름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애플의 공급자 리스트에 저희 회사를 올려 보겠다는 부푼 꿈을 가지고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던 즈음에 저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야 맙니다. 


  이렇게 여러 달을 지나 구매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 본사로 들어와서 가격 관련 세부사항을 협의하자고 합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싶어 얼른 엔지니어 한 명과 짐을 꾸려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습니다. 까다로운 입국 절차(왜 왔는지, 언제 떠나는지, 어디 묵을 건지를 대략 3번 정도는 반복해서 들었던 것 같네요)를 마치고 차량을 렌트해서 호텔에 투숙을 했습니다. 미팅은 다음날인지라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쉬었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입니다!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의 본사 건물을 찾아갔습니다. 날씨도 좋은지라 선글라스를 끼고 창문을 내린 채로 기쁜 마음으로 약속된 땅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권정보로 등록을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정말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춰 저희를 회의실로 안내해 줬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구매팀장이 들어왔습니다. 남자인 제가 봐도 참 잘생겼다 느껴지는 친구였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해 보건대 독일계 미국인 같았는데, 잘 먹어서 그런지 피부도 좋고 얼굴도 작은 데다 몸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일단 지고 들어갑니다.


  자 이제부터 군대 이후로 거의 하지 않았던 '삽질의 추억'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려는데 노트북 연결잭이 맞지 않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는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마쳤거니와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노트북은 삼성 모델이었습니다. 당황한 채로 휴대폰에 자료가 있어 구매팀장 노트북으로 옮겨 주려고 했더니 제 휴대폰도 역시 갤럭시였습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던 제 옆의 엔지니어는 제 속도 모르고 뭐가 잘 못 된 거냐며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하겠다고 당당히 나섭니다. 그 역시 삼성 노트북과 갤럭시를 쓰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는데 말이죠. 


  애플을 방문하면서 경쟁사 노트북에 휴대폰을, 그것도 두 사람 모두 똑 같이 들고 가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정장 아래 겨드랑이에 흐르는 땀이 느껴집니다. 날이 많이 덥지는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정장을 벗어던지고 싶어 졌습니다. 시작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구매팀장의 노트북을 빌려 발표를 마치고 몇 가지 사항을 논의했으나, 그의 표정은 이미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미국인이라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의 비매너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선배들한테 듣기로는 예전에 국내 자동차 회사 연구소를 방문하면 그 회사 차량을 제외한 타사 제조 차량은 아예 진입을 금지했다는 얘기까지 있었습니다. 사실상 비즈니스의 기본 매너인 거죠. 그렇게 허망하게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리고 본사에 복귀했습니다. 그 후로도 애플 사람들과 몇 번의 메일은 주고받았지만, 물론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국 그 비즈니스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교훈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잦은 출장 등으로 조용히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인 자료만 챙겼지 그에 대한 리뷰나 플랜 B에 대한 준비는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애플 본사에 경쟁사 모델을 당당히 들고 들어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겠다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바보 같은 실수였습니다. 


  형식적으로나 기본적인 태도나 모두 점수를 잃었겠지만 궁극적으로 발표를 하다 보니 자료에 대해 제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테크니컬 한 내용이라고 치부하기엔 제 공부 수준이 턱 없이 부족했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거든 제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스토리 텔링을 해야 하건만 제가 봐도 횡설수설하는 느낌이었으니 상대방이 보기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준비하고 또 준비해도 얻을까 말까 한 기회를 안일한 대처로 날렸으니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이런 실수 덕에 저는 사내 발표건 외부 발표건 미리 준비하고 혼자 리허설하며 준비합니다. 물론 준비하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표를 해내시는 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저는 발표에 소질이 없는지라 열심히 준비해서 중간은 가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확실한 건, 준비를 탄탄히 하고 한 발표와 대충 준비한 발표는 듣는 이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듣는 이 까지 안 가더라도 본인이 발표하면서 이미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사과회사와 비즈니스를 꿈꾸는 분이라면 구형일지라 사과회사 노트북과 폰을 준비하시는 것이 점수를 따지는 못하더라도 잃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비즈니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감한 상황은 맞지 않으실 수 있을 터이니 염두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여차저차하여 사과회사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 생활에 갤럭시가 불편한 점이 많아 부득 갈아타게 되었습니다. 케이스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다 청소를 위해 휴대폰 뒷면의 한 입 베어문 사과를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애플 구매팀장의 그 난감한 표정과 제 겨드랑이를 타고 흐르던 묵직한 땀방울이 다시금 떠 올리며, 철없던 지난날의 실수에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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