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사계 - 겨울(계획만 세우면 소는 누가 키우나)
찬바람이 불면 직장인들에겐 큰 행사가 있습니다. 회사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겠지만 운영계획이나 사업계획 정도로 부르는 다음 해를 그려보는 계획을 작성하는 일입니다.
늘 의아스럽습니다. 도무지 예측이 어려운 내년을 어떻게 예측하고 내년이라고 해봐야 바로 몇 달 뒤인데 뭐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도 회사에서 시키니 우리네 직장인들은 까라면 까야지요.
자 이제 작업을 시작해 봅니다. 우선 숫자 맞추기 놀이입니다. 대략적인 매출 규모와 비용 규모를 산출해서 어느 정도 손익이 나올지 가늠해 봅니다. 이렇게 각 사업부 단위로 모인 손익을 보고 중앙부서(보통 기획팀이나 기획실이라고 하지요)에서 매출과 손익을 조정합니다. 너무 적거나 많으면 CEO나 그룹에 보고하기 좋게 숫자를 만져 줍니다. 이미 실제 예측한 계획과는 거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실무 부서에선 늘 불만입니다. 어차피 손 보고 할 거 지들 맘대로 숫자를 내려주면 되지 뭔 놈의 취합은 시키냐고. 그래도 기초 숫자는 있어야 칼질을 하니 뭐 애교로 넘어가 줍니다.
다음으로 그 숫자를 바탕으로 예쁜 PPT 슬라이드를 만듭니다. 보기 좋은 떡이 무조건 먹기 좋다는 신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 나갑니다. 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놈의 PPT는 정말 직장인을 괴롭히기 위해 만든 악마 같은 놈입니다. 어지간한 공력을 들여서는 예쁘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 조차 거의 노가다 수준으로 노동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아이입니다.
다들 말들은 그럴싸합니다. 굳이 디자인 신경 쓰지 말고 내용에 충실하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현실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기는 구성을 좀 바꿔야겠다, 여기는 그래프 형태를 바꿔야겠다, 색감이 좀 튄다 등 고객님의 요구사항에 맞게 온갖 화장을 해대다 보면 버전은 이미 여러 가지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보고서를 편집하는 게 아니라 숫제 새로 여러 개의 보고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파일명 뒤에 숫자가 하나씩 붙어 나갑니다. 그러다 'VF(Version Final)' 같은 사적인 희망을 담은 파일명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끝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제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꼬리가 붙습니다. 그러다 '진짜 정말 마지막 '이라는 꼬리까지 붙는 경우도 있습니다. 웃픈 현실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어떤 대표분은 사업계획의 프리뷰를 하라고 합니다. 골자를 먼저 잡아서 보고하라는 것이지요. 간단히 만들라고 하지만 '알아서 긴다'는 말이 있듯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원' 분들은 모든 보고서에 진심입니다. 초단기적인 일들에 집중하는 그분들의 습성상 본보고 수준으로 만들어서 준비를 합니다. 우리네 정규직 노동자들만 죽어 납니다. 프리뷰를 저 높은 곳에서 갈아엎으면 또다시 새로운 아이를 잉태해야 합니다. 다시 배 불리고 산고를 겪어 새로운 아이를 내놓아야 하는 격이지요. 다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PPT와 사생결단 씨름합니다.
계획을 잡고 실행하는 건 분명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 필요한 일인 건 맞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번잡스럽고 시간과 정신을 다 털어 먹다 보니 정작 소는 누가, 언제 키우는지 헷갈립니다. 본연의 가치를 위한 일들에 충실하기가 쉽지 않지요. 악순환입니다.
황량한 시즌입니다. 찬 바람도 불고 집에 갈 분들은 벌써 짐을 싸셨구요. 뒤숭숭합니다. 한창 인사철이라 희비가 엇갈리고 환호성과 탄식이 함께 터져 나오는, 다들 붕 떠서 지내는 시절입니다. 내년을 기약하는 계획을 세우는 기간에 누군가는 집에 가야 하고 누군가는 진급하고, 또 누군가는 진급에 실패해서 마음 아파하는 참으로 미묘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야 내년의 봄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진리를 맘에 다시 새기며 새로운 겨울을 맞이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