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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四] 수능시험의 추억

직장인의 사계 - 가을(학창 시절의 가을걷이-수능)

by 등대지기

아무 생각 없이 나선 출근길에 시험장 명칭과 방향이 표시된 패널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수확을 거둘 운명의 날이 오늘이었네요. 주변에 수험생이 많지 않아서인지, 예년처럼 날씨가 춥지 않아서 인지 제 관심밖에 있던 일이 새삼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평소 출근길보다 사람이 많아지긴 했습니다. 팽팽하게 긴장된 얼굴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벌써 20년도 훌쩍 넘겨 버린 일이네요. 제가 수능을 보던 날의 날씨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서 버스에 올라 15분 정도를 이동했습니다. 시험장 앞에는 얼굴은 모르지만 학교 후배님들이 파이팅을 외쳐주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들이 꿈속의 일인 양 멍한 정신으로 시험장에 들어갑니다. 원래 늘 약속시간 보다 다소 일찍 도착하는 습관이 있어 아직 시험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았습니다. 시험장엔 이미 도착해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분들도 있고 책상에 엎드려 주무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제 시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교시는 언어영역입니다. 화장실을 다시 한번 다녀오고 찬 물로 세수도 해봅니다. 손에 물을 묻혀 상의 안쪽에 묻힙니다. 열을 식히기 위해 그렇게 구석구석 시원하게 문대 봅니다. 시험장에 돌아와 바지도 걷어서 시원하게 몸을 유지하고는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싸주신 보온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합니다. 누구와 먹었고 무엇을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냥 식사를 평소처럼 일지감치 마치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는 오침을 했습니다. 평상시의 루틴대로 똑같이 점심시간의 단잠을 마칩니다. 오후 시험도 지끈 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어렵사리 마쳤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잠시 대기하고 있을 때 문득 어머니가 싸주신 보온병의 녹차가 생각났습니다. 각성효과가 있다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싸주셨던 녹차. 어찌나 세게 뚜껑을 닫으셨는지 빡빡합니다. 어렵사리 열어 생각 없이 들이켰다가 입천장이 홀랑 까졌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때문인지 보온병의 성능 때문인지 팔팔 끓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시험장을 나섭니다. 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무용담을 나눕니다. 횡단보도에 서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던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뭔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진공 속에 놓여 있는 듯한 멍한 느낌으로 집으로 가 잠시 쉬다가 동네 친구들과 맥주를 한 잔 하고 쉬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 긴 하루가 제 인생에서 이렇게 오롯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제 삶에 역사적인 날이긴 했었나 봅니다. 다행히도 운이 좋아 저는 인생에 단 한 번만 수능을 봤습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걸 평가하는 시스템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름 열심히 준비한 것들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면에서는 나름의 의미는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수험생 분들이 시험을 무사히 마치기를, 시험을 마치고 홀가분한 맘으로 하루 훌훌 털고 보내시길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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