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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四]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직장인의 사계-봄(오랜만에 해외출장을 다녀오니...)

by 등대지기

오랜만에 해외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갈 때는 11시간, 올 때는 13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비행시간의 압박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이역만리타국에서 4일 정도를 보내고 돌아와 보니 역시나 한국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수출하는 아이템과 연관된 전시회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습니다. 사악하게도 그 기간이 정확히 설 연휴와 겹쳐 독박을 쓰듯 떠났습니다. 와이프는 일부러 연휴 때마다 일정 잡는 거 아니냐는, 제가 듣기엔 야속하지만 아내가 보기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법한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습니다. 작년 추석엔 12일간 명상 코스에 들어갔고 그다음인 이번 설에는 통으로 일주일간 출장을 간다고 하니 뭐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불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몸이 고되고 힘든 건 상관없는데 명절에 아들을 보지 못하는 부모님과, 남편 없이 시댁에 갈 아내와, 아버지 없이 긴 연휴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가족을 뒤로하고 떠난 출장길이기에 더욱 발길이 무거웠습니다. 출국하는 날 새벽부터 폭설이 오기 시작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도 온통 눈길이었습니다. 비행기는 애당초 한 시간 지연출발 한다고 메시지를 받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길을 뚫고 길고 긴 시간을 거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습니다. 집에서 리무진 타러 나간 시간과 공항 대기시간, 비행시간과 호텔로 이동하고 체크인 한 시간까지 모두 합치니 대략 2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눈이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도박과 술, 마리화나가 일상인 그곳에서 영어를 써가며 외국인들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중국어야 뭐 오래 써왔으니 언제 써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금방 올라갑니다만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합니다. 멍 해지기도 하고, 시차로 인해 눈뜨고 잠시 조는 블랙아웃처럼 시간만 지나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디인지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멍해집니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 됩니다. 비싼 비행기 타고 온 출장이니 만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몸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렇게 낮 시간은 제게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듯한 몽환적인 시간을 선사합니다.


이제 밤입니다. 일과는 마쳤고 현지 주재원, 유관 업체 분들과 저녁식사를 합니다. 다들 피곤한 몸을 한 잔 술로 녹여내며 서로를 위로합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를 걸어 봅니다.


한국 과는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는 너무도 자극적입니다.


우선 눈이 돌아갑니다.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번쩍이는 커다란 네온사인이 온통 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빛공해가 심하다는 느낌이었고, 빛으로 때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사정없이 제 정신을 후드려 갈기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코가 혹사당합니다. 저는 인공적인 냄새, 특히 강한 향수 등을 오래 맡으면 속이 좋지 않습니다. 코가 예민해서 아내도 향수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강한 향수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리를 걷다가도 몇 번이고 속이 울렁거립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피워대는 시큼한 마리화나 냄새는 더욱더 제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렇게 더부룩하던 속이 한국에 오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회복되는 걸 보니 역시나 그 냄새들의 강한 자극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귀가 따갑습니다. 약물에 취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텐션이 높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고함치듯 울려 댑니다. 마치 천장에서 소리가 울리는, 사람으로 가득 찬 술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기저기 있는 식당에서 울리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거리 공연을 위해 틀어놓은, 과도할 정도로 볼륨을 높여 심장까지 그 음파가 전달되는 소리들에 금세 피곤해집니다.

배가 더부룩합니다. 연일 먹는 고기 위주의 식사에 늘 뱃속이 부대끼는 느낌입니다. 열심히 콜라를 마셔도 잠시 뿐이고 오히려 그 콜라까지 더해져 더욱 괴로운 상황이 연출됩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달래 된장국이 사뭇 그리워집니다.


1차는 마쳤으니 한국인의 기상으로 2차를 가봅니다.


인파를 뚫고 들어간 Irish Pub이라고 쓰인 식당은 시끌벅적합니다. 다행히 조용한 한쪽 구석으로 안내해 줍니다. 옆 테이블엔 동양계이지만 이미 미국 생활이 오래되었는지 동양인에서 서양인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년 부부가 앉아 있습니다. 저 멀리 중간의 넓은 테이블엔 피부가 하얗다 못해 눈이 시린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모여 과한 웃음과 표정으로 연신 떠들어 댑니다. 너무도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표정에서 존재의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기네스 3잔과 간단한 음식들로 가볍게 2차를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미국 생활에 이미 적응한 현지 주재원 친구가 제가 깨닫지 못했던 걸 알려 줍니다.


아까 식당에서 저희를 구석으로 안내한 건 일종의 인종 차별이라고 합니다. 본인은 자주 느낀다고 합니다. 명색이 Irish Pub인데 어디 아시아계 노랭이들이 밖에서 잘 보이는, 식당의 중앙에 앉냐는 뜻이라고 합니다. 저희 엽의 노란 피부의 중년 부부도 마찬가지로 구석으로 살짝 치워든 거라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니 과하게 친한 척하던 서버 아줌마의 푸근했던 모습이 삐에로 가면을 쓰고 남들을 해치는 영화 속 캐릭터로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철저히 팁을 위한 가식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펐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팁만을 위한 건 아닐 거라는, 일말의 인간적 애정은 있었으리라는 자기 위한을 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찜찜한 맘으로 호텔로 돌아갑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의 그 화려함이 결코 아름답거나 멋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얗게 덕지덕지 얼굴에 분칠을 한 가부키 화장을 한 늙은 여우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가려도 본심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 억지웃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미국 친구들이 왠지 짠해 보이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위와 비슷한 스케줄로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날들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멀고 멀었지만 13시간 걸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도 맘이 푸근해집니다.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사무실이 너무나 편안합니다. 천상 머슴질 해 먹을 팔자인가 봅니다.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은 산속의 시냇물 소리 같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대나무들이 바람에 부딪혀 흘려보내는 속삭임 같아 청량한 느낌마저 듭니다.

역시나 떠나봐야 현재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출장길에 나서보면 제 직장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늘 떠남이 반갑습니다. 어딘가 목적지로의 이동이 아닌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 한 발 떼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설레임이 일어나니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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